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307화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이었다. 은채는 창밖으로 눈송이가 흩날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고 여린 눈꽃들이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아 세상을 온통 순백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늘 그랬듯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릿한 그리움과 함께 지난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았다.

오래된 약속의 그림자

‘이젠 정말 마지막인가…’

은채의 눈동자에는 깊은 피로와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30년 전, 눈꽃이 휘날리던 그 날 지훈과 함께 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그 마을, ‘늘봄골’은 이제 쇠락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거대한 개발의 물결 앞에서 작은 배처럼 흔들리다 결국 침몰 직전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마을 회관 벽에 걸린 낡은 달력에는 오늘이 ‘늘봄골 존폐 결정 최종 회의’ 날이라고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할머니, 얼른 오셔서 아침 드세요!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요.”

작은딸 수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수아는 도시에서 안정된 삶을 살다, 어머니의 고집 때문에 늘봄골로 돌아와 함께 마을을 지키는 일에 동참했다. 그녀의 눈에도 이미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은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밥상 앞에 앉았다. 끓어 넘치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콧속을 간질였지만, 식욕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찌개 너머, 문득 30년 전 그날의 풍경으로 향했다.

눈송이 속의 맹세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펑펑 쏟아졌다. 스무 살의 은채와 지훈은 늘봄골 가장 높은 언덕에 서서, 눈 덮인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은채야, 우리는 이 마을을 지켜낼 거야.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자. 약속해.”

지훈의 목소리는 뜨거웠고,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 같았다. 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눈송이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응, 약속해. 지훈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러나 그 약속은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서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훈은 홀연히 마을을 떠났다. 어떤 말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그 후로 30년 동안, 은채는 지훈의 그림자와 그와의 약속을 품고 늘봄골을 지켜왔다. 홀로 서서 무너져가는 마을을 붙잡고 발버둥 쳤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깊은 상처와 지쳐버린 마음뿐이었다.

예기치 않은 방문객

그때였다. 낡은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수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젊은 남자였다. 눈이 덮인 검은 코트 차림의 그는 이 오래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남자의 손에는 낡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김은채 어르신 댁이 맞으신가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은채의 귓가를 스쳤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서 아련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은채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진우라고 합니다. 사실, 여길 찾아온 건… 제 아버지 때문입니다.”

진우의 말에 은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설마…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제게 이 상자를 전해주시며 반드시 늘봄골의 김은채 어르신께 갖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우는 들고 있던 낡은 나무 상자를 은채의 앞에 내려놓았다. 손때 묻은 상자에는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린 시절, 지훈과 함께 깎아 만든 작은 나무 조각에 새겼던, 늘봄골의 상징이었다.

은채의 손이 떨렸다. 마치 얼어붙은 시간을 깨는 듯한 강렬한 충격이었다.

“누구… 누가 너의 아버지냐?”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진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 아버지 성함은 박지훈입니다.”

되살아나는 기억, 혼돈 속의 희망

‘박지훈’. 30년 동안 그녀의 심장을 짓누르던 이름이 다시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은채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편지 한 묶음과 오래된 사진 몇 장, 그리고 작은 은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은반지는 예전에 지훈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가장 위에 놓인 편지 봉투에는, 30년 전 지훈의 글씨체로 또렷하게 ‘은채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읽어 내려가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잊었던 과거의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되살아났다. 지훈은 자신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과, 그곳에서 은채를, 그리고 늘봄골을 잊지 않고 살아왔음을 적고 있었다. 그는 늘봄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잠시 떠났던 것이며, 예상치 못한 사고로 오랜 시간 돌아오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마치 칼날처럼 은채의 가슴을 베었다.

‘은채야,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너 혼자 그 약속을 지키게 해서…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 내가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남긴 이 상자와 함께 우리의 약속을 이어갈 사람이 너에게 갈 것이다. 늘봄골은 우리의 꿈이었다. 그 꿈을 반드시 지켜내 줘.’

은채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서러움,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의 파편들이 뒤섞여 그녀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30년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강제로 열리는 듯했다.

수아는 놀란 얼굴로 어머니와 진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이토록 격한 감정은 처음 보았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수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은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진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우의 눈빛이 지훈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아버지는 늘 늘봄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은채 어르신에 대해서도요.”

진우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봄골의 명맥을 이을 방법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계획을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진우는 낡은 나무 상자 밑바닥에서 숨겨져 있던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냈다. 서류들 위에는 ‘늘봄골 재생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은채의 손에 들린 지훈의 편지가 서서히 축축해졌다. 30년 전 눈꽃이 흩날리던 날의 약속은, 그들이 잊은 줄 알았던 시간에 갇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 찾아온 이 ‘희망’이 과연 현실일 수 있을까?

늘봄골의 운명을 결정할 회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창밖으로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