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08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톡톡 두드리던 저녁이었다. 이제 막 해가 서쪽 산 너머로 숨고 있었지만, 그 빛은 이미 힘을 잃고 희미한 잔상만을 남기고 있었다. 선아는 찻잔을 든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 낙엽은 바싹 마른 채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고, 앙상한 가지들만이 덧없이 흔들렸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마치 오래된 꿈이 끝나고 새로운 막이 오르기 직전의,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늘 그랬듯이,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문틈으로 스며들어온 존재가 있었다. 바로 달빛이었다. 검은 털이 은은한 윤기를 띠고, 초록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길고양이. 처음 만났던 날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달빛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선아의 곁에 있어 주었다.

달빛은 익숙하게 선아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게감이 선아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달빛은 조용히 선아의 손에 얼굴을 비볐고, 이내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작은 진동이 선아의 팔을 타고 전해지면서, 얼어붙었던 감정들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달빛아, 너는 알까. 이 계절의 끝이 주는 쓸쓸함을.”

선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달빛은 고개를 들어 선아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눈빛은 늘 그래왔듯, 어떤 깊은 이해와 침묵의 공감을 담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는다는 듯이.

“요즘 따라 꿈자리가 뒤숭숭해. 자꾸만 떠나가는 것들이 보여. 붙잡을 수 없는 시간들, 사라져가는 기억들… 어쩌면 내가 잊고 싶었던 것들마저 다시 찾아오는 기분이야.”

선아의 말에 달빛은 조용히 앞발을 들어 선아의 뺨을 살며시 건드렸다. 발톱은 한껏 숨기고, 오직 부드러운 털만이 선아의 피부에 닿았다. 그 섬세한 움직임 속에서 선아는 달빛의 메시지를 읽어냈다. ‘괜찮아, 걱정 마.’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선아는 달빛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찻잔의 온기만이 손끝을 데웠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잎을 모두 떨군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으니, 오직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것만이 남은 것처럼.

“달빛아, 가끔은 말이야…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만 홀로 남겨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들 때가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걸까?”

선아의 물음에 달빛은 갑자기 무릎에서 내려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사진첩 앞으로 걸어갔다. 코를 킁킁거리며 흑백 사진들을 담은 앨범 위를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선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달빛을 바라보다가 이내 앨범을 집어 들었다.

오래된 앨범 속에는 어린 시절의 선아,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젊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잊고 지냈던 순간들, 퇴색했지만 여전히 생생한 추억들이 앨범 페이지마다 숨 쉬고 있었다. 선아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따뜻했던 엄마의 미소, 든든했던 아빠의 어깨. 그리고 그 시절의 자신.

“아…”

선아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달빛은 앨범을 보고 있는 선아의 발치에 다시 와서 조용히 앉았다. 그 초록빛 눈은 여전히 선아를 향하고 있었다. 달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은 많아.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지.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이 남긴 온기. 그것이 너를 이끌어온 힘 아니었을까?’

선아는 앨범을 닫았다. 마음속을 헤집던 쓸쓸함과 불안감은 거짓말처럼 옅어져 있었다. 대신 따뜻한 그리움과 알 수 없는 충만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서도 영원히 간직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달빛이 일깨워준 것 같았다.

“고마워, 달빛아. 네 덕분에 또 한 번 답을 찾은 것 같아.”

선아가 달빛을 안아 올렸다. 달빛은 선아의 어깨에 기대어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털이 선아의 뺨에 닿았다. 창밖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별빛은 마치 달빛의 눈처럼, 멀리서도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선아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겨울이 오고, 새로운 봄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처럼. 달빛이 곁에 있는 한, 어떤 계절의 끝자락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작은 생명이 전하는 위로와 지혜는,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선아의 삶을 밝히는 은은한 달빛과도 같았다. 선아는 그 밤, 어둠 속에서도 가장 빛나는 존재와 함께 깊어가는 계절의 끝을 조용히 맞이했다. 다음 계절은 또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올까. 선아는 달빛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다음 새벽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