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운이 짙게 깔린 산모퉁이 작은 빵집, ‘따스한 온기’에는 벌써부터 분주한 움직임이 감돌았다. 새벽 별이 희미해질 무렵, 오븐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빵 냄새는 아직 잠들어 있는 동네 골목골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밀가루 반죽이 살아 숨 쉬듯 부풀어 오르는 소리, 노릇하게 구워지는 빵들이 익어가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에 겹쳐지는 서연 씨와 미연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
오늘도 미연은 여느 때처럼 능숙하게 반죽을 다루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빵들은 단순한 밀가루 덩어리가 아니었다. 온 마음을 다해 어루만지고 다듬는 그 손길 속에는 빵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서연 씨의 곁에서 빵을 구워 온 미연은 이제 빵집의 없어서는 안 될 기둥과도 같았다. 밝고 쾌활한 미소는 언제나 빵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작은 행복을 선사했고, 그녀가 만드는 빵에는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오늘 새벽, 서연 씨는 미연에게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언제나 활기 넘치던 그녀의 눈빛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흥얼거렸을 콧노래 대신, 오븐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침묵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서연 씨는 애써 모른 척하며 미연의 옆을 지났다. 괜한 질문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드리운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서연 씨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넘어 빵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빵집은 활기로 가득 찼다. 갓 구운 바게트의 고소한 향, 슈크림빵의 달콤한 유혹, 그리고 앙버터의 쌉쌀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어우러져 손님들을 맞이했다. 미연은 손님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평소보다 옅었다. 몇몇 단골손님들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듯했지만, 바쁜 아침 시간에는 길게 물어볼 틈이 없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빵집 문이 열리며 낯선 할머니 한 분이 들어섰다. 굽은 허리와 주름진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할머니는 빵집을 한참 둘러보더니, 진열대 한쪽에 놓인, 오늘 미연이 특별히 정성을 들여 구운 ‘쑥설기 빵’ 앞에서 멈춰 섰다. 쑥의 향긋함과 쫄깃한 식감이 일품인, 어찌 보면 요즘 유행하는 빵들과는 거리가 먼,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빵이었다.
“아가씨, 이 빵은 참으로 정겹게 생겼구먼. 시골 할미가 어릴 적 먹던 쑥설기랑 꼭 닮았어.”
할머니의 말에 미연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겨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할머님. 할머니들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 한번 만들어봤어요. 직접 캔 쑥으로 만들어서 향이 아주 좋아요.”
할머니는 쑥설기 빵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눈가에 순간 이슬이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깊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이구, 세상에… 이 맛은… 우리 어무이가 해주던 딱 그 맛이여. 강원도 작은 마을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그 쑥설기… 아가씨는 혹시 강원도 사람인가?”
할머니의 질문에 미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미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니의 말은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억의 파편을 건드렸다. 아주 어릴 적, 희미하게 들려왔던 부모님의 대화. ‘강원도… 할머니… 쑥설기…’ 그 단어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모님은 미연이 아주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후 미연은 보육원에서 자랐고,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늘 안개처럼 희미했다. 특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부모님이 아주 가끔씩 언급하던 ‘강원도에 사시는 할머니’라는 단편적인 정보뿐이었다. 잊고 지낸 줄 알았던,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에 먹먹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리움이었다.
할머니는 미연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쑥설기 빵을 극찬했다. “참으로 대단하구먼. 이 빵에서 고향 냄새가 나. 어쩌면 이렇게 옛 맛을 잘 살려냈는지… 젊은 아가씨가 기특혀.”
미연은 겨우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가 빵집을 나선 후에도, 미연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빵 진열대 한편에 남아있는 쑥설기 빵에 머물러 있었다. 빵은 단순히 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잊고 싶었던, 혹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아픈 과거와 연결된, 너무나도 선명한 고리였다.
“미연아, 괜찮니?”
서연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냈다. 미연은 깜짝 놀라 서연 씨를 돌아보았다. 서연 씨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미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물었다.
“아침부터 표정이 안 좋더니… 무슨 일 있었니? 아까 그 할머니 말 때문에 그래?”
미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서연 언니… 사실은….”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 미연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서연 씨에게 아주 어릴 적 부모님에게서 들었던 강원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부모님과의 어떤 갈등 때문에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고, 자신은 한 번도 그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어릴 때는 그저 막연한 이야기였는데, 오늘 그 할머니가 쑥설기 빵 이야기를 하시니까… 갑자기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제가 만들었던 쑥설기 빵에서, 그 할머니가 고향 냄새가 난다고 했을 때… 마치 제가 그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어릴 때 부모님 옆에서 그 할머니가 만들던 쑥설기 빵을 본 적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걸까요?”
미연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동안 씩씩하게 살아왔던 그녀의 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깊은 외로움과 갈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연 씨는 말없이 미연을 안아주었다. 따뜻한 빵 냄새가 가득한 빵집 안에서, 미연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타인의 온기에 기댈 수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남긴 물건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낡은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어린아이의 손으로 그린 듯한 삐뚤빼뚤한 그림과 함께, 뒷면에 펜으로 휘갈겨 쓴 오래된 지명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유일한 단서였다.
“미연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괜찮아.” 서연 씨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마음속에 그런 아픔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하지만 이제 알았으니, 내가 너와 함께할 거야.”
미연은 서연 씨의 품에서 조용히 울었다. 수년간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서연 씨는 미연을 진정시킨 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빵집을 하면서 많은 기적들을 봤잖아. 작은 빵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했지. 네가 만든 쑥설기 빵도 오늘 어떤 기적의 시작일지 누가 알겠니?”
미연은 고개를 들었다. 서연 씨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미소와 함께,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슬픔이 배어 있었지만, 작은 희망의 씨앗이 움트는 듯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단서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세상은 생각보다 좁고,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단다. 우리가 함께 찾아보자.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너에게 큰 의미가 있을 거야.”
서연 씨의 말은 미연의 마음속에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를 녹이는 듯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빵집은 언제나 미연에게 집이었고, 서연 씨는 그녀에게 가족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가족은 미연의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함께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미연은 서연 씨에게서 물러나, 조심스럽게 가슴 속 주머니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한 어린아이가 삐뚤빼뚤 그린 듯한 나무와 집이 그려져 있었고, 그 뒷면에는 오래된 펜으로 쓰인 듯한 ‘강원도 고령리, 최복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미연의 손이 떨렸다. 이것이 과연 그녀의 할머니일까. 그녀의 기억 속 단편적인 정보와 오늘 할머니의 말, 그리고 빵집의 쑥설기 빵이 엮어낸 기묘한 우연은, 이제 단순한 우연을 넘어 미연의 삶을 뒤흔들 거대한 변화의 서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스한 온기의 빵 냄새가 다시 한번 빵집 안을 가득 채웠다. 미연은 사진 속 글자를 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희망과 불안감이 뒤섞인 채, 그녀의 눈빛은 빛바랜 사진 속 글자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 또 하나의 기적이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