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 김지훈은 낡은 차 안에서 창밖을 응시했다. 차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왜곡시켰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철거 직전의 을씨년스러운 골목이었다. 몇 달 전, 은채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는 단서를 쫓아 헤매던 중,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던 장소. 이제는 흔적만 남은 과거의 조각들 사이에서, 그는 또 다른 조각을 찾고 있었다.
그가 찾던 곳은 ‘미래 희망 복지관’이라는 빛바랜 간판이 걸린 낡은 건물이었다. 간판의 글자들은 거의 지워져 있었고, 녹슨 철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낼 듯 위태로워 보였다. 지훈은 차에서 내려 축축한 아스팔트 위를 걸었다. 빗물이 그의 낡은 코트와 신발을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심장은 이 낡은 건물만큼이나 오래된 절박함으로 뛰고 있었다.
“여기가… 맞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곳은 은채가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곳 중 하나라는 추측이 나왔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잠시나마 그녀를 품어주었던 이름 없는 공간들 중 하나. 지훈은 늘 은채의 흔적을 쫓아 낡은 건물과 잊힌 골목을 헤맸다. 그녀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듬어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철문을 조심스럽게 밀자,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안쪽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인 복도, 깨진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 모든 것이 시간을 잃은 듯 멈춰 있었다. 지훈은 휴대폰의 불빛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 끝,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법한 큰 방이 눈에 들어왔다.
방 안에는 낡은 탁자와 의자들이 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덮개도 없이 방치된 낡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 피아노 앞에 섰다. 건반 위를 손가락으로 쓸자, 먼지와 함께 희미한 음색이 울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지훈아, 이 노래 알아? 은채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어린 은채가 해맑게 웃으며 그에게 어떤 동요를 불러주던 모습. 그녀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가 불렀던 노래는 경쾌했지만, 그 눈빛에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지훈은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복지관 관계자 명단 중 유일하게 연락이 닿았던 ‘박옥순’이라는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복지관 폐쇄 이후에도 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단 하나의 희망. 빗속을 뚫고 좁은 골목을 한참 헤맨 끝에, 그는 작고 허름한 양장점 앞에 섰다. ‘옥자 양장점’이라는 간판이 낡은 전구 불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돋보기를 쓴 채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지훈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낡은 원단 냄새와 오래된 물감 냄새가 섞인 독특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실례합니다. 박옥순 여사님 되십니까?”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돋보기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은 맑고 형형했다.
“누구신지?”
“미래 희망 복지관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김지훈이라고 합니다.”
‘미래 희망 복지관’이라는 말에 할머니의 눈빛에 미세한 흔들림이 스쳤다. 그녀는 재봉틀을 멈추고 옆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지훈은 조심스럽게 앉았다. 할머니는 녹차 한 잔을 내주며 그를 다시금 찬찬히 살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복지관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는데.”
“혹시… 이은채라는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그의 입에서 ‘은채’라는 이름이 나오자, 할머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내 희미해졌다.
“은채라…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지. 조용하고 사려 깊었던 아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제가 그녀의 첫사랑입니다. 어릴 적 헤어진 후로… 계속 찾고 있습니다.”
지훈의 말에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첫사랑이라… 그래, 은채도 그런 사랑이 있었겠지. 늘 가슴에 품고 있던 것 같았어.”
“혹시… 은채가 복지관을 떠난 후,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아니면… 그녀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기억이라도…”
할머니는 잠시 먼 산을 보듯 창밖을 응시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은채는…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달랐어.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또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지.”
지훈은 숨을 죽였다. 이 순간이, 어쩌면 수많은 밤을 헤매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었다.
“책임감이라니요?”
“그 애에게는 동생이 있었어. 아주 어린 동생. 부모를 잃고 복지관에 왔을 때도, 은채는 늘 동생을 챙겼지. 밤마다 동생을 안고 자면서, ‘내가 꼭 동생을 지킬 거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어.”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생? 은채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가 알던 은채는 외동딸이었다. 어린 시절 내내 그녀는 홀로 모든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동생이요? 저는… 은채가 외동딸인 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은채에게는 해맑고 예쁜 여동생이 있었지. 이름이… 은비였나. 그런데 어느 날, 복지관에 아주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어. 아이들의 친척이라며 찾아온 사람들이 동생을 데려가려 한다는 말이었지. 복지관에서는 막으려 했지만… 친부모의 형제들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어. 그 사람들은 은비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은채는 그걸 직감했던 것 같아.”
“그래서요? 은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할머니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은채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모든 걸 짊어지기로 했어. 동생을 데려가려던 그 사람들에게 ‘내가 갈 테니, 동생은 건드리지 마라’고 했던 것 같아. 정확한 내막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애는 어린 동생을 홀로 남겨두지 않으려 했던 거야. 결국, 은비는 한 부유한 가정으로 입양되었고, 은채는… 그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지.”
지훈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은채가 사라진 이유. 그녀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진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어린 소녀가 동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뼈아픈 선택이었다.
“그럼… 은채는… 그 사람들에게 끌려간 겁니까?”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그 이후로 은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아마… 자신의 이름조차도 바꾸고 살았을 거야. 동생을 지키겠다는 그 약속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숨었을 테지. 첫사랑도, 이름도, 과거도… 모두.”
할머니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지훈은 손에 쥔 녹차 잔이 식어버린 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은채의 사라진 이유. 그것은 그가 상상했던 어떤 슬픈 이야기보다 훨씬 더 아프고 숭고한 희생이었다.
은채는 그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스스로를 지웠던 것이다. 그녀의 행방은 이제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소녀의 처절한 사랑과 헌신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가야 하는 지훈의 어깨는, 이제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짓눌리는 듯했다.
빗소리가 더 거세지는 듯했다. 지훈은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그는 은채를 찾아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그녀를 찾아, 그녀가 짊어진 짐을 함께 나누어지고 싶었다. 그녀가 감당했던 외로움의 무게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의 첫사랑은, 결코 잊혀진 사랑이 아니었다. 깊은 상처 속에 숨겨진, 살아있는 사랑이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훈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옥자 할머니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꼭 찾아줘. 그 착한 아이,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야 할 텐데…”
양장점 문을 나서자,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그러나 지훈의 눈빛은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결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은채의 숨겨진 과거는 그를 더 깊은 미궁으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그의 발걸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동생, 은비. 그 이름이 이제, 새로운 실마리가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