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321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아련하게 부서졌다. 김민준은 낡은 차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의 발밑에는 오래된 자갈들이 부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렸다. 도시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시간이 멈춘 듯한 작은 해변 마을, ‘등대리’. 몇 주 전, 이름 모를 제보자가 보낸 닳고 닳은 엽서 한 장이 그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엽서 뒷면에는 흐릿한 글씨로 ‘추억이 머무는 곳’이라는 문구와 함께 낡은 등대 그림이 전부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찍힌 우편 소인은 이곳 등대리의 것이었다.

민준의 눈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낡은 등대를 향했다. 붉은색과 흰색이 바래고 벗겨진 등대는 수십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낸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 등대 너머, 짙푸른 바다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가슴 한구석에서 잊히지 않는 얼굴, 한수진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바다를 유난히 좋아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의 메마른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

마을은 조용했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민준은 가장 먼저 마을의 유일한 우체국을 찾았다. 허름한 건물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혹시… 몇 년 전, 이 마을에서 부쳐진 엽서 중에, 이런 그림이 있는 걸 보신 적 있으신가요?” 민준은 주머니에서 엽서 사본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돋보기 안경 너머로 엽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늙으니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하지만 이 등대는 우리 마을 상징이나 다름없지. 엽서로 자주 팔렸던 것 같네만…”

수확은 없었다. 민준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는 엽서 그림처럼 오래된 느낌을 주는 ‘해변 사진관’이었다. 낡은 나무 간판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색이 바랜 가족사진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쿰쿰한 필름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계세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쪽 커튼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누구신가? 사진 찍으러 왔으면, 이제 나는 손이 떨려서 못 찍어줘.”

“아닙니다, 할머니. 혹시… 이십 년쯤 전에, 여기서 사진을 찍었던 분을 찾고 있습니다.” 민준은 수진의 몽타주를 꺼내 보였다. “한수진이라는 이름의 여자분인데…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빛바랜 사진 속 그림자

할머니는 몽타주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주름진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 얼굴은… 글쎄, 워낙 많은 사람이 다녀가서… 하지만 도시에서 온 아가씨들은 기억에 남는 법이지. 좀 특이한 분위기의 아가씨였나?”

민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네, 좀… 아련하고, 슬픈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사진을 잘 안 찍으려 했던… 그런 분입니다.”

“아하…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수년 전, 젊은 처녀가 이 근처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었지. 어찌나 도망을 가려 하던지… 겨우 몇 장 찍어줬네.”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작업실 안쪽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오래된 필름들은 다 창고에 넣어뒀는데…”

할머니가 뒤적거리는 동안, 민준은 사진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오래된 명화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낡은 카메라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시간이 박제된 공간이었다.

얼마 후, 할머니는 먼지투성이의 두꺼운 앨범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게 아마 그때쯤 정리했던 앨범일 거야. 워낙 오래된 거라 찾기 힘들었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넘기기 시작했다. 빛바랜 흑백 사진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낯선 사람들의 웃는 얼굴,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그리고 바닷가의 풍경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심장이 조여드는 듯했다. 매번 실망해야 했던 지난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거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멈췄다. 한 장의 사진. 다른 사진들과는 달리 인물이 정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뒷모습이었다. 얇은 스카프를 두른 채 바닷가를 향해 서 있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를 배경으로,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응시하듯 고요히 서 있었다. 흐릿했지만, 그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쓸쓸함과 익숙한 분위기에 민준의 손이 멈췄다.

“이… 이 스카프…”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기억했다. 수진이 가장 아끼던, 직접 뜨개질해서 만들었다던 푸른색 계열의 스카프. 그것과 똑같은 무늬와 색상이었다. 아니, 색상은 흑백 사진이라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섬세한 짜임새와 어깨를 감싸는 모양새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할머니가 다가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 아가씨였나. 맞어, 이 아가씨는 늘 뒷모습만 찍어달라고 했지. 얼굴은 세상에 보이기 싫다고. 꼭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어. 아마 한 이십 년은 더 된 사진일 거야.”

민준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동시에 굳건해졌다. 수진이었다. 분명 수진이었다. 수많은 허탕과 좌절 속에서 그는 드디어 그녀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뒷모습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작은 사진 한 장이 가져다준 희망은 동시에 더 큰 절망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는 사진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뒷모습 사진 아래, 아주 작게,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방파제 끝, 비밀의 의자.’

이것은… 단서였다. 할머니에게 허락을 구하고 사진을 조심스럽게 앨범에서 떼어냈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사진관을 나서며, 민준은 방금 찾은 사진을 손에 쥐고 다시 등대 쪽을 향했다. 방파제 끝, 비밀의 의자. 어쩌면 그곳에, 수진이 남긴 또 다른 흔적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기대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등대리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추적의 끝이, 과연 이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