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는 낡은 서랍장을 열었다. 나무 특유의 오래된 냄새와 함께 먼지가 훅 끼쳐왔다. 지난 가을 어머니가 떠나신 후, 이 방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늦겨울의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모습이 수아의 마음처럼 시렸다.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손을 댈 때마다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날카롭게 박혀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늘 잔잔한 호수 같았다. 격렬한 파도는 없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그 아래 깔려 있었다. 수아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으로는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늘 바쁘고, 늘 어딘가에 몰두해 있던 어머니는 수아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 엄격한 훈육과 냉철한 기대를 더 많이 주었다. 그 때문에 수아는 성인이 된 후에도 늘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과,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서랍장 깊숙한 곳, 낡은 스웨터들 아래에서 수아의 손에 낯선 감촉이 닿았다. 그것은 작고 투박한 나무 상자였다. 먼지를 털어내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문양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십 통의 편지였다. 모두 수아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들이었다. 하지만 단 한 통도 봉투에 넣어지지 않은 채, 그저 차곡차곡 접혀 상자 안에 잠들어 있었다.
수아의 심장이 갑자기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비밀의 문을 연 듯한 기분이었다. 맨 위에는 가장 최근 날짜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쓰인 것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오랜 망설임 끝에 수아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쳤다.
사랑하는 나의 딸, 수아에게,
이 편지를 네가 읽을 때쯤이면, 엄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네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 될 거라 생각하니,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평생을 살면서 너에게 가장 미안하고 후회되는 것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란다. 너는 아마 엄마를 차갑고, 늘 바쁘고, 어딘가 너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 여겼을 거야. 그리고 그건, 어쩌면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어렸을 때, 엄마는 참으로 많은 두려움에 시달렸단다. 혼자서 너를 키워야 했던 어린 엄마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 너를 지켜내기 위해 발버둥 쳤어. 그 시간들이 엄마를 강인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너에게 부드러운 모습을 보일 여유마저 앗아갔지. 늘 완벽해야 한다고, 그래야 너와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어. 그래서 너에게도 엄격했고, 너의 작은 실수에도 크게 반응하곤 했지.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미숙한 엄마의 사랑 방식이었단다.
기억나니, 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수학 경시대회에서 2등을 하고 돌아왔을 때? 너는 칭찬받을 줄 알았겠지만, 엄마는 오히려 1등을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 그날 밤, 너는 방에서 혼자 울었을 거야. 엄마는 방문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단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너를 안아줄 수가 없었어. 너에게 너무도 미안했지만, 동시에 ‘이만큼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엄마를 지배했기 때문이야. 네가 더 강해지기를 바랐던 그 마음이, 결국 너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엄마는 이미 너와 너무 멀어져 있었지.
하지만, 수아야. 엄마는 네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단다. 네가 잠든 얼굴을 밤새도록 바라보고, 작은 손톱을 깎아주며 행복에 겨워했던 시간들이 엄마의 인생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네가 힘들어할 때마다, 엄마는 속으로 수백 번도 넘게 네 이름을 불렀어. 하지만 그 마음이 네게 닿지 못하고 늘 마음속에 갇혀 버렸으니,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네가 독립을 하고 나서, 가끔씩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잘 지내세요?” 하고 묻는 목소리에서도 엄마는 너의 어색함과 동시에 엄마를 걱정하는 진심을 느꼈단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이 편지를 쓰곤 했어. 네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여기에 다 적어 내려갔지.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네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그리고 엄마는 늘 너의 편이었다는 것을. 네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속마음들을 말이야.
이 편지를 네가 읽을 때쯤이면,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안아줄 수도, 네 손을 잡아줄 수도 없겠지만, 부디 이 편지가 너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엄마는 너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사랑하는 나의 딸, 수아야. 행복하렴.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수아의 눈은 점차 흐려졌다. 글자들은 겹치고 흔들렸고, 결국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종이 위로 떨어졌다. 미처 마르지 않은 잉크처럼, 그 눈물은 어머니의 글씨를 번지게 만들었다. 차갑고 단단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머니의 삶 이면에 이토록 여리고 아픈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니.
수아는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쌓여 있던 오해와 억울함, 그리고 스스로를 옥죄던 죄책감까지, 모든 감정의 응어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해방의 울음이었다. 어머니의 엄격함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사랑이었음을, 그 침묵이 곧 스스로를 다독이며 수아를 위해 버텨낸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차가웠던 종이 위로 어머니의 온기가, 수십 년간 미처 전해지지 못했던 마음이 스며드는 듯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이 편지들을 통해, 살아있는 동안 다 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야 그녀의 마음이 수아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너무 늦었지만, 그래서 더 아프고, 그래서 더 깊게 스며드는 이해였다.
창밖의 햇살이 희미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수아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존재는 물리적으로 사라졌지만, 그 마음은 이 편지 한 장에 담겨 영원히 수아의 곁에 머무를 터였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상자 속의 다른 편지들을 천천히 꺼냈다. 하나씩,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을 마주할 준비를 하며, 수아는 비로소 어머니와의 진정한 재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 편지들은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혼이 수아에게 보내는, 시대를 초월한 가장 따뜻한 포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