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안개가 가시지 않은 강변북로를 달리는 지훈의 차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여명이 도시의 윤곽을 천천히 드러내고 있었다. 322화. 서연을 찾아 헤맨 지루한 시간의 숫자는 이미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숫자 따위가 그의 심장을 옥죄는 갈증을 해소해줄 리 만무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낡은 사진 한 장.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어린 서연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년 여인이 함께 웃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잉크가 번진 희미한 글씨로 ‘혜수 이모와 함께, 1995년 여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혜수 이모. 이 이름은 최근 몇 년간 지훈이 쫓았던 가장 유력한 단서였다. 서연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연을 잠시 돌보았다는 친척. 그 후 서연이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지 그녀와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인물. 지훈은 혜수 이모의 옛 주소를 찾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서울 외곽의 오래된 주택가 어딘가에 그녀가 살았다는 기록을 손에 넣었다.
잊힌 골목의 그림자
차는 점차 도심을 벗어나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낡은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담벼락에는 이름 모를 덩굴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지훈은 주소지에 적힌 번지수를 따라 걷다가, 허름하지만 정갈한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녹슨 철제 대문 너머로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이곳이 혜수 이모의 집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먹먹한 소리가 집 안으로 울려 퍼졌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한번 눌러보려던 찰나, 옆집 대문이 빼꼼 열리더니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내밀었다. 눈초리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누구 찾아왔어?”
“안녕하세요, 혹시 이혜수 씨 댁이 맞나요? 옆집에 사시는 분이신가요?” 지훈은 명함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명함을 힐끗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혜수 아줌마? 여기 이사 간 지가 언젠데. 벌써 10년도 넘었어. 집은 그때 팔고 갔지.”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또다시 헛걸음인가. 10년이라니. 그가 쫓는 단서는 늘 이렇게 한 발짝 늦었다. “이사 가셨다고요? 혹시 어디로 가셨는지 아실까요?” 그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 노인정에 가서 몇 번 만났었는데, 그때는 제주도 간다고 했었던가? 아니면 강화도였나… 나이 드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희미한 기억 속에서 더듬는 할머니의 말은 지훈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지훈을 불렀다.
“잠깐만, 젊은 양반. 혹시 그 혜수 아줌마가 왜 그렇게 젊은 사람을 찾냐고, 딸이라도 되냐고 물었었나?”
“아, 딸은 아니고… 제 첫사랑입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할머니의 눈빛에 연민의 그림자가 스쳤다.
“첫사랑… 젊은 양반도 참 안됐네. 혜수 아줌마가… 딱 한 번 그랬어. 그 아이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다고, 혹시 그 아이를 만나거든 ‘그때 그 자리에 있어달라고 전해달라’고. 자기가 자주 가던 찻집이 있다고 했지. 어릴 때 그 아이 엄마랑 같이 갔던 곳이라고.”
지훈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찻집이요? 어떤 찻집인지 아실까요?”
“으음… 그때 그 아줌마가 그랬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곳, 창가에 늘 흰 제비꽃 화분이 놓여있고, 낡은 오르골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라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 거기서 한참을 혼자 울기도 했었지. 서연인가? 그 아이 엄마 생각난다고….” 할머니는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멈춘 찻집
혜수 이모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찻집의 묘사는 지훈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곳’, ‘흰 제비꽃 화분’, ‘낡은 오르골’. 이 세 가지 단서를 가지고 지훈은 서울 시내의 오래된 골목들을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 밤낮을 발품 팔아 돌아다닌 끝에, 그는 마침내 종로구의 한적한 골목 안쪽에서 혜수 이모가 묘사했던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늘품 찻집’이라는 간판이 바래 있었고, 낡은 목조문 위에는 흰 제비꽃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은은한 허브 향이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작은 공간은 앤티크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고, 창가에는 햇살이 비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지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카운터 옆 진열장에 놓인 낡은 오르골이었다. 마치 혜수 이모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푸근한 인상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떤 차 드릴까요?”
지훈은 차마 주문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이혜수 씨라는 분을 아시나요?”
아주머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혜수 언니요? 네, 알죠! 여기 단골이셨는데… 한 십 년 전쯤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요. 왜 찾으세요?”
“제가… 혜수 씨가 찾던 서연이라는 아이를 찾는 사람입니다.” 지훈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서연이… 아, 서연이. 그 언니 조카죠? 여기도 몇 번 같이 왔었어요. 엄마 손 잡고 왔었지. 어릴 때도 참 예뻤는데.”
지훈은 숨을 참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서연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실까요?”
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어 낡은 일기장 같은 것을 꺼냈다. “혜수 언니가 이사 가기 전에 제게 맡긴 게 있어요. 혹시라도 서연이가 찾아오면 전해달라고요. 서연이 엄마가 쓰던 거라고… 언니도 언젠가 서연이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 믿었나 봐요.”
그것은 낡은 가죽 커버의 수첩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애틋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서연이 어머니의 것이라고요?”
“네. 혜수 언니가 몇 년 전 서연이가 한 번 찾아왔었다고 했었어요. 잠깐 얼굴만 보고 그냥 돌아갔다고… 언니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몰라요. 그때 혹시 다음에 서연이가 찾아오면 이걸 꼭 전해주라고 했어요.”
지훈의 손이 떨려왔다. 서연이가… 이곳에 왔었다고? 단지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라니. 그는 수첩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첫 페이지에는 잉크가 바랜 글씨로 ‘나의 소중한 딸, 서연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뒷장에는, 어머니의 글씨체로 쓰인 듯한 짧은 메모가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 어쩌면 서연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일지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메시지
“사랑하는 서연아,
이 수첩이 너의 손에 닿을 때쯤이면 엄마는 아마 너와 함께 있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너를 사랑한단다. 너의 삶이 어떤 모습이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는 늘 너를 응원할 거야.
이 세상은 때때로 잔인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울 수 있단다. 하지만 너는 강한 아이니, 분명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만약 네가 길을 잃거나, 어디론가 숨고 싶어지면, 기억해다오. 우리 가족의 오래된 약속을. 네가 처음으로 꽃을 심었던 그 자리.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울 수 있는 너만의 비밀 정원을.
그곳에서 널 기다릴게. 설령 엄마의 육신이 아니더라도, 엄마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에게도 그곳을 알려주렴. 너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진실한 사람에게만. 엄마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 언제나, 영원히.”
지훈의 손에 든 수첩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서연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비밀 정원’에 대한 암시. ‘네가 처음으로 꽃을 심었던 그 자리’. 그 말이 지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서연과의 어린 시절 기억을 되짚었다. 함께 뛰어놀던 공원, 비밀 아지트를 만들었던 숲속, 그리고… 어린 서연이 꺾어온 야생화를 땅에 심으며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겠다고 했던 작은 언덕배기.
그곳은 바로 그들이 처음 만났던 동네 뒤편, 아무도 모르는 작은 숲 속 공터였다. 시간은 흘러 그 공터는 잊혔지만, 지훈의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서연이 그곳을 ‘비밀 정원’이라고 불렀던 것을 지훈은 기억했다. 그곳이 서연이 숨고 싶을 때 가는 곳이었다니. 지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수백 화를 거쳐 달려온 이 지독한 추격의 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일까. 서연은 정말 그곳에 있을까?
지훈은 수첩을 소중히 품에 안고 찻집을 나섰다. 밖은 이미 초저녁의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혜수 이모를 통해 얻은 단서, 서연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그리고 그의 오랜 기억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장소.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322화. 길고 긴 여정의 끝이, 어쩌면 바로 내일, 혹은 오늘 밤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