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는 또다시 꿈의 심연에서 허우적대다 깨어났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잊힌 이름들이 입술 끝에서 맴돌았고, 무한한 상실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흐릿한 잔상들이 기억의 파편처럼 흩어졌지만,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질수록 더욱 멀어져 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습하고 눅진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곳은 ‘어머니의 심장’이라 불리는 고대 동굴 깊숙이 숨겨진 임시 거처였다. 안전하지만, 그만큼 고립된 공간이었다.
침상 옆, 닳고 닳은 가죽 상자 위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낡은 종이에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누구인지, 왜 이 사진이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통증만이 그 여인이 그의 잃어버린 과거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그 꿈이었나요?”
낮고 부드러운 엘리아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서 작은 불꽃을 들고 서 있었다. 항상 차분하고 이성적인 그녀의 눈빛 속에는 시우를 향한 깊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엘리아는 조용히 다가와 시우의 옆에 앉았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 하지만 잡을 수가 없어. 손을 뻗으면 사라져 버려.” 시우는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내가 누구였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대체 뭘 해야 하는지… 모든 게 혼란스러워.”
엘리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시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시간의 흐름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당신의 의지는 변치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위로였지만, 동시에 무거운 진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시간의 흐름에 불안정한 변동이 감지되고 있어요. ‘안배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그들이 무언가를 바꾸려 하고 있어요.”
‘안배자들’. 시우의 뇌리에는 그 단어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억은 없지만, 그 이름에서 오는 압도적인 위협감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의 틈새를 조작하고, 역사를 자신들의 뜻대로 바꾸려는 존재들. 그들과 시우의 관계는 그의 잃어버린 기억의 핵심일 터였다.
엘리아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금속 장치를 꺼내 시우에게 내밀었다. 표면에는 고대 문자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당신이 남긴 마지막 기록의 파편이에요. 어젯밤, 시간의 지류에서 흘러들어 왔어요. 매우 불안정하지만,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시우는 장치를 받아 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장치를 활성화했다. 흐릿한 영상과 함께 잡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바로 시우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지금의 시우에게는 없는, 굳건하고 절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기억의 봉인… 깨어나면 안 돼… 최후의 기록은… 잊혀진 탑… ‘하얀 숲의 심장’… 그곳에… 모든 진실이… 위험해… 나의… 마지막… 임무…”
목소리는 이내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영상은 몇 개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거대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낡은 탑. 그리고 그 탑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빛을 발하는 묘한 문양. ‘하얀 숲의 심장’이라는 단어가 시우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엘리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하얀 숲의 심장’은 접근하기 매우 위험한 곳이에요. ‘안배자들’이 오랫동안 감시해 온 곳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다시 시간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 기억이 더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어요. 기억의 파편들이 서로 충돌해서….”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과거 몇 번의 시간 이동 때마다, 시우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기억의 혼란을 겪었다. 어떤 때는 잠시나마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신을 향한 과거의 메시지, 그리고 ‘진실’이라는 단어가 그를 강렬하게 이끌고 있었다. 이끌림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가야 해.” 시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이것 말고는 단서가 없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내 기억을 봉인한 이유가 무엇이든, 그 안에 내가 해야 할 마지막 임무가 담겨 있다면… 난 가야만 해.”
엘리아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안배자들’은 당신이 기억을 되찾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거예요.”
시우는 다시 한번 금속 장치를 움켜쥐었다. 그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과거의 자신의 의지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는 동굴을 벗어나 고대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하얀 숲의 심장’이라 불리는 탑은 아득한 저편, 시간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듯했다.
울창한 숲을 뚫고, 왜곡된 시간의 잔재들이 흩뿌려진 공간을 지나, 마침내 시우는 거대한 탑 앞에 섰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하얀 숲의 심장’이었다. 탑의 표면은 오래된 기억처럼 희뿌옇고, 시간의 풍파를 견뎌낸 상흔들로 가득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탑의 가장 높은 곳, 영상에서 보았던 문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로처럼 얽힌 내부를 헤치고, 끝없는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둥근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탑의 핵처럼 빛나는, 고대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수정 구체가 놓여 있었다.
시우가 수정 구체에 손을 대는 순간, 탑 전체가 굉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수정 구체에서 빛줄기가 뻗어 나와 시우의 이마를 관통했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시우의 주변을 에워싸고 그를 억압하는 듯했다. ‘안배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정 구체는 그의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고통과 함께 어지러운 영상들이 그의 정신을 휘감았다. 그는 보았다. 파괴된 도시,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얼굴…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시우가 아니었다. 훨씬 더 강하고, 냉철하며, 동시에 깊은 슬픔을 간직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그에게 직접 말을 걸어왔다.
“나… 과거의 나… 이 기록을 발견했다면… 시간이 얼마 없어. 기억을 잃은 건… 필연적인 선택이었어. 모든 것을 보호하기 위해… 너는 중요한 존재야. 이 모든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영상은 더욱 격렬해졌다. 탑 전체가 마치 폭발할 것처럼 흔들렸다. ‘안배자들’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하며 시간의 흐름을 뒤틀기 시작했다. 시우의 정신은 분열될 것만 같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과거의 목소리가 절규하듯 외쳤다.
“…기억의 봉인을 풀어야 해…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그녀만이… 모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가지고 있어… 그녀의 이름은… 유진…”
‘유진’. 낯선 이름이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박혔다. 동시에, 수정 구체는 마지막 힘을 다해 하나의 이미지를 그의 정신에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그것은 빛바랜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 여인이 바로 유진이었다. 모든 것이 연결되는 순간, 강력한 시간의 왜곡이 공간을 집어삼켰다. 시우는 손을 뻗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유진의 얼굴이, 그리고 그를 압도하는 진실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눈부신 섬광과 함께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탑은 침묵했고, 시우는 의식을 잃어갔다. 그의 기억은, 여전히 미완의 조각들로 남겨진 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