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의 햇살이 은채의 도예 공방 ‘바람의 흙’ 창가로 스며들었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결에 섞인 흙 내음과 갓 피어난 풀잎의 싱그러움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계절이었다. 은채는 물레 앞에서 흙덩이를 빚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두 손은 무심하게 흙을 다듬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여전히 굳어진 흙처럼 단단한 슬픔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슬픔은 15년 전, 그날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을 감싸 안은 그림자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둥근 그릇의 형태가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공방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은채야.” 지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고, 어딘가 모르게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은채는 물레의 속도를 늦추며 고개를 들었다. 지훈의 얼굴은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어렴풋한 희망 같은 것이 아른거렸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
지훈은 늘 은채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15년 전, 그 혼란스러운 사고 속에서 은채의 곁에 남아 함께 절망하고, 함께 찾아 헤매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웬일이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은채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입꼬리는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 지훈은 늘 그녀를 찾아왔지만, 오늘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억누르지 못하는 어떤 절박함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지훈은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나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손에는 낡은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내가… 지난 15년간 해오던 일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고, 은채는 흙 묻은 손을 닦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수없이 많은 곳을 헤매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데 포기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야.”
은채의 심장이 이유 모를 불안감에 덜컥 내려앉았다. 지훈이 언급하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고,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던 것. 잃어버린 딸, 해원. 그 이름이 그녀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어내지 못했다.
지훈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이었다. “이 아이… 기억나?” 그는 사진을 은채의 앞에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어린 소녀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소녀의 동그란 눈매와 오뚝한 콧날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익숙했다. 그리고 은채의 시선은 소녀의 왼쪽 눈썹 위, 작은 점 하나에 멈췄다.
그때 그 아이의 흔적
은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작은 점. 너무나 희미해서 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었던, 아주 어릴 적 해원에게만 있던 흔적이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사고 현장의 아비규환, 사라진 아이를 찾아 헤매던 처절한 밤들, 그리고 결국 찾아오지 않았던 작은 희망. 은채는 자신이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봉인해 두었던 그 모든 아픔이 다시 날것 그대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 이 아이가….” 은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손이 사진을 향해 뻗어갔지만, 차마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15년 전, 그날 사고 현장에서 실종 처리되었던 아이들 중, 유일하게 발견되지 못했던 해원이와 모든 인상착의가 일치해. 왼쪽 눈썹 위의 작은 점, 태어날 때부터 작게 있던 오른쪽 손목 안쪽의 푸른 반점까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DNA 검사 결과가 나왔어.”
그의 마지막 말에 은채의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DNA 검사. 그것은 모든 의심을 무너뜨리고, 모든 희망을 현실로 바꾸는 절대적인 증거였다.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과 오랜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기적 같은 희망이 뒤섞여 그녀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지금… 어디에… 있어?” 은채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15년간 마르지 않던 눈물이었지만, 오늘 흐르는 이 눈물은 슬픔이 아닌, 희미한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감격이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다른 서류 몇 장을 더 내밀었다. “이 아이는… 사고 후 한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몇 년 뒤 한 가정으로 입양되었어.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더라. 이름은… 김서연. 아주 밝고 건강하게 잘 자랐어.”
봄바람처럼 전해진 소식
김서연. 낯선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 속에는 그녀의 피가, 그녀의 시간이, 그녀의 사랑이 녹아 있었다. 15년. 아기가 어른이 되는 시간. 그녀는 그 시간 동안 해원이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혹은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 빈자리에 한 줄기 봄바람처럼 따스한 소식이 찾아온 것이다.
은채는 사진 속의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 그녀의 젊은 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입양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딸. 그녀는 과연 자신을 엄마로 받아들일까? 혹시 그녀의 평화로운 삶에 자신이 불쑥 나타나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벅찬 기쁨 뒤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해… 지훈아?” 은채는 사진을 가슴에 품고 흐느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 순간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그녀는 한없이 나약해졌다. 잃어버렸던 아이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꿈만 같았지만, 동시에 이제 그녀는 그 아이의 어긋난 시간을 어떻게 메울지, 어떤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지 고민해야 했다.
지훈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였다.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야, 은채야. 다만… 난 네가 더 이상 혼자 아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리고 서연이도… 분명 엄마를 찾고 싶어 했을 거야. 아니, 엄마의 존재를 모르고 자랐다 할지라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은채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 너머로 지훈의 따뜻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찢어질 듯한 아픔과 동시에 솟아나는 생명력. 잃어버렸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15년 전 아이를 잃었을 때의 무기력함과는 달랐다. 이제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거대한 불씨가 생겼다. 그것은 그녀를 움직이게 할 힘이었다.
바람의 흙 공방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햇살 아래 갓 피어난 나뭇잎들이 살랑이며 춤을 추었다. 그 바람은 15년간 잊혔던 이름, 해원이, 이제는 서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의 딸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소식을 은채의 마음에 속삭이는 듯했다. 은채는 사진 속 서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삶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지만 강렬한 희망의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제,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