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한지우의 작업실에는 늦은 시간까지 불이 환했다. 오래된 목조 건물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올 때마다, 지우는 붓을 든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다. 캔버스 위에는 이제 막 형태를 갖춰가는 흐릿한 풍경이 있었다. 창밖의 세상이 침묵한 채 잠들어가는 동안, 그녀의 심장 속에서는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새며 붙잡고 있던 이 그림은 유독 진척이 없었다. 물감의 색은 자꾸만 탁해지고, 붓질은 엉키는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흡사 제 마음속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얼마 전부터 그녀를 짓누르는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 현우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어버린 그것은, 마치 먹구름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지우야, 아직 안 자고 뭐 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현우였다. 따뜻한 온기가 스며든 현우의 손이 지우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몸이 화들짝 놀라며 경직되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의 온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지우는 현우의 어떤 접촉에도 움찔거리곤 했다. 마치 닿으면 깨져버릴 유리 조각처럼, 혹은 꽁꽁 숨겨둔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현우야… 아직 작업 중이었어.”
지우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입꼬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현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캔버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였지만, 현우의 눈빛은 따뜻하고 이해심으로 가득했다.
“무슨 그림인데?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현우의 직감은 항상 날카로웠다. 지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는 얼른 붓을 내려놓고 팔레트를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그의 눈길이 그림에서 자신에게로 향하기 전에, 이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고 싶었다.
“그냥… 밤 기차에서 본 풍경이 문득 생각나서. 그때 너랑 처음 만났던 그 밤 있잖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불빛들…”
지우는 애써 과거의 기억을 꺼내며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 밤 기차에서 시작된 낯선 인연. 그 기적 같은 만남이 지금의 자신들을 만들었다. 현우는 지우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그의 향기에 안겼을 때, 지우는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의 날카로운 가시가 심장을 찔렀다.
“응. 그랬지. 그때의 넌, 왠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어. 작은 움직임에도 부서질 것 같은… 하지만 그 눈빛은 너무나 강렬했지.”
현우는 지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랑과 추억으로 충만했지만, 지우의 귀에는 가시처럼 박혔다. 현우는 지금의 지우에게서 그 밤의 위태로움을 다시 느끼고 있는 걸까. 그녀의 가면이 벗겨지고 있는 걸까.
“…나, 요즘 잠을 잘 못 자.”
결국, 지우의 입에서 나직한 고백이 흘러나왔다. 잠시의 침묵 후, 현우는 그녀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따뜻했다. 걱정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알고 있었어. 요즘 계속 늦게까지 깨어 있잖아. 그리고… 안색도 안 좋고. 무슨 일 있어? 말해줘, 지우야.”
현우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지우의 두 손을 잡아 제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쿵. 규칙적으로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지우의 손바닥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강하고 흔들림 없는 박동. 그 소리를 들으니, 지우의 내면에서 억눌렸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려 했다.
‘말해야 해. 이제는… 숨길 수 없어.’
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몇 주간 그녀를 갉아먹었던 두려움, 절망, 그리고 현우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통. 그것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이 막혔다.
“현우야… 나… 실은…”
그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현우는 지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길은 지극한 사랑과 온기로 가득했다.
“말해도 괜찮아, 지우야. 어떤 이야기라도 다 들어줄게.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일은 없어. 기억해? 그 밤 기차에서 내가 그랬잖아. 우린 이미 서로의 가장 깊은 곳에 닿아버렸다고. 무슨 일이든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밤 기차.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서로의 눈빛을 마주했을 때,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붙잡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순간. 낯선 이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토록 깊은 인연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순간부터 자신들은 이미 서로의 운명이었음을… 지우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진실을 그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우는 현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마침내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실의 일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 병원에 다녀왔어. 최근에 계속 몸이 안 좋아서…”
현우의 품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지우는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우는 단 한 번도 건강 문제로 병원을 찾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현우의 얼굴은 충격과 당혹감, 그리고 깊은 불안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병원? 무슨… 무슨 소리야, 지우야. 어디가 아픈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손이 지우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지우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현우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 인연은, 이미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숙명이 되어버렸으니.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의사 선생님이… 좀 더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우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그 밤 기차에서 시작된 낯선 인연.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함께 헤쳐왔던 그들의 사랑 앞에, 이제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