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거짓말처럼 풋풋한 흙냄새와 물 오른 나뭇가지들의 속삭임이 섞여 있었다. 서연은 창가에 기대어 멀리 야트막한 산자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이 희미한 연둣빛 옷을 걸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서연에게는 늘 새로운 희망과 더불어 잊고 지낸 상처를 끄집어내는 잔인한 계절이었다.
수아가 사라진 지 벌써 십수 년. 그 시간 동안 서연의 마음속 봄은 단 한 번도 온전히 찾아온 적이 없었다.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치 어린 수아의 웃음소리가 흩날리는 꽃잎처럼 제 곁을 스쳐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애달프고 아려오는 그리움은 그녀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손안에 쥐어진 낡은 사진 속 수아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 속 작은 새 모양 목각 인형을 꼭 쥐고 있는 수아의 손을 서연은 지긋이 쓰다듬었다.
“수아야…”
나직한 부름에 돌아오는 것은 오직 봄바람이 흔드는 창문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마저 수아의 흐느낌처럼 들려 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의 악몽은 여전히 생생했다. 갑작스러운 산사태, 흙더미에 갇힌 마을, 그리고 지훈과 수아를 찾아 헤매던 처절했던 자신의 외침. 모두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실종되었고, 어린 수아는… 그렇게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믿었다.
그녀의 삶은 그때부터 정지된 시간 속을 표류했다. 희망 없는 수색을 멈추지 않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소문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제는 그만 놓아주라’고 말했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서연은 점점 더 외로운 섬이 되어갔다.
오래된 편지, 새로운 징조
그날 오후, 낯선 우편물 하나가 서연의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낡고 빛바랜 봉투. 받는 사람의 주소는 서연의 이름으로 분명했지만,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작은 흙먼지가 묻어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마치 수십 년 전의 시간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봉투를 뜯자, 안에는 낡은 종이 한 장과 함께 작고 닳아버린 물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종이에는 익숙한 듯 낯선 필체로 단 몇 줄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동풍이 불어오는 곳.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지훈이 기다립니다.’
지훈. 그 이름 석 자가 서연의 눈앞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 그녀의 첫사랑이자, 수아를 마지막까지 함께 지키려 했던 사내. 그는 죽었을 것이라고, 아니, 죽었어야만 했다. 살아있다면 왜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왜 이제야 이런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일까. 아니, 설마, 지훈이 살아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 종이와 함께 봉투 안에 있던 작은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작고 닳아버린 목각 인형. 바로 수아가 늘 가지고 다니던, 서연이 직접 깎아 만들어 준 작은 새 모양의 인형이었다. 똑같은 상처, 똑같은 색깔. 그 어떤 모조품도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한쪽 날개가 부러져 있었다. 서연은 털썩 주저앉아 그 목각 인형을 부여잡았다. 차가운 나무 조각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것은, 수아의 것이다. 분명히. 수아가 사라지던 그날, 함께 진흙더미 속에 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목각 인형이었다. 수아가 늘 품에 안고 다니던, 작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서연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지훈이 살아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수아의 목각 인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혹시 수아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이 그녀의 가슴을 미친 듯이 때렸다.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심장이 살아있는 것처럼 격렬하게 고동쳤다.
동풍이 전해온 마지막 희망
서연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지훈이 기다린다는 ‘동풍이 불어오는 곳’,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소가 있었다. 어릴 적 수아와 지훈과 함께 비밀 아지트처럼 드나들던, 마을 어귀의 거대한 느티나무. 그곳은 항상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마치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새싹처럼, 그녀의 심장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봄바람의 속삭임과 같았다. 망설임은 사치였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고, 낡은 코트를 걸쳐 입었다. 손안의 목각 인형이 아직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집을 나서자, 차가운 듯 포근한 봄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 속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종달새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서연은 느티나무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십수 년 만에 찾아온 단서. 어쩌면 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그녀의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유일한 희망일지도 몰랐다.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과연 지훈이 있을까?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수아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길게 이어진 오솔길 끝에 서연의 심장이 목청껏 울부짖었다. 이 길이 끝나면,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숨을 내쉬며, 서연은 마침내 그 오래된 나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을 맞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