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동네 이장님의 하루 – 제106화

늘봄리의 아침은 늘 정직했다. 텃밭의 상추는 밤새 이슬을 머금고 푸르게 돋아났고, 멀리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햇살은 마을 회관 앞 느티나무에 가장 먼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햇살보다 한 뼘 먼저, 김덕수 이장님은 마을을 깨우는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허허, 이놈의 자전거도 벌써 열 해를 넘겼으니, 이제는 저 느티나무만큼이나 오래된 친구여!”

낡은 자전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장님의 웃음소리는 언제나처럼 청명했다. 늘봄리의 106번째 아침을 맞이하는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늘따라 이장님의 마음 한구석에 작은 근심거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정겨운 쉼터’의 문제였다.

정겨운 쉼터의 그늘

정겨운 쉼터는 늘봄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수십 년 전,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지은 작은 정자로,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막아주고 겨울에는 따뜻한 햇볕을 품어주던 곳. 어르신들은 이곳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쉼터 주변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자랐다. 이장님 또한 어린 시절, 쉼터 마루에서 친구들과 주먹밥을 나눠 먹던 추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는 비켜가지 못하는 법. 지난 장마철을 겪으며 쉼터 기둥 하나가 심하게 부식되었고, 지붕 일부는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전문가의 진단 결과,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예상 견적은 마을 예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마을 회의에서는 한숨 소리만 가득했고, 이장님의 유쾌한 미소에도 잠시 그늘이 드리웠다.

“이장님, 저 쉼터를 저대로 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없는 돈을 어찌 마련한답니까?”

새로 귀촌한 젊은 농부 준영 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의 말은 곧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이장님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가,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 답답할 때마다 피우던 버릇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의 답답함보다 해결책을 찾는 유쾌한 에너지가 더 필요했다.

“허허, 준영 씨.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지 않나. 우리 늘봄리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지혜와 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지! 걱정 말게. 이 이장님이 기발한 수를 찾아낼 테니.”

그렇게 말하며 이장님은 쉼터 주변을 서성였다. 낡은 나무 기둥을 쓰다듬고, 햇살이 부서지는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쉼터는 그저 정자가 아니었다. 늘봄리의 역사이자,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이 켜켜이 쌓인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장님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추억이 샘솟는 장터

다음 날 아침, 이장님은 마을 방송을 통해 중대한 발표를 했다.

“늘봄리 주민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 여러분! 이 이장, 김덕수가 중대 발표를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정겨운 쉼터가 아프다는 소식에 모두들 마음이 아프실 겁니다. 하지만 슬퍼만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제가 제안합니다. 이름하여 ‘늘봄리 추억 나눔 장터’!”

마을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추억 나눔 장터라니? 이장님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각 가정에 잠자고 있는 물건들! 추억이 담겨 있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옷가지, 오래된 책, 할머니가 뜨개질로 만드신 수세미, 아버지가 젊은 시절 쓰시던 만년필,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까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 물건들을 들고 나와서 서로 나누고 판매하는 겁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재미도 있고, 그 수익금은 모두 쉼터 보수 공사 기금으로 모으는 겁니다!”

마을 방송은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주민들도 이장님의 열정적인 설명에 점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마을 회관은 난생 처음 보는 활기로 가득 찼다. 박옥순 할머니는 젊은 시절 입었던 고운 한복을 내놓았고, 김민준 씨는 도시에서 가져온 오래된 기타와 음반들을 가져왔다. 읍내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 부부는 직접 만든 수제 잼과 쿠키를 판매하겠다고 나섰다.

이장님은 밤늦도록 장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낡은 플래카드를 다시 페인트칠하고, 텅 빈 마을 회관 마당에 테이블을 배치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보았다. 쉼터가 아프다는 소식에 한숨만 쉬던 사람들이, 이 장터를 통해 다시금 서로의 손을 잡고 마음을 나누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음이 모여 꽃이 피다

장터가 열리는 날, 늘봄리는 아침부터 들썩였다. 햇살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마을 회관 마당은 형형색색의 물건들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흥정하는 소리, 옛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목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오래된 축제 같았다. 이장님은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띄웠다.

“박옥순 할머니! 이 고운 한복은 누가 사갈꼬? 어서 와서 이 한복을 입고 곱게 사진 찍어가시오!”

“김민준 청년! 기타 솜씨는 언제 봐도 일품이구먼! 어서 한 곡 뽑아주게, 장터 분위기가 더 살아나게!”

민준 씨는 처음에는 쑥스러워했지만, 이장님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통기타를 잡았다.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서정적인 멜로디에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노래는 장터에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고, 기타 케이스에는 작은 지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인기가 많았던 코너는 ‘이장님 보물찾기’였다. 이장님이 집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를 들고 나와 ‘보물’이라고 칭하며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였다. 낡은 카메라, 빛바랜 사진첩, 심지어는 이장님 자신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팽이까지. 각 물건에 얽힌 이장님의 구수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지갑을 열었다. 어느덧 오후가 깊어지고, 해 질 녘이 되자 장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장님은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모인 돈을 세어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돈보다 더 값진 것은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난 환한 미소와,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쉼터를 고치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끊어졌던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지고, 잊혔던 공동체의 의미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장님, 고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다 같이 웃고 즐겼네요.”

준영 씨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촉촉한 물기가 서려 있었다. 이장님은 준영 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허허, 뭐가 고맙다는 건가? 고마워할 건 우리 늘봄리 사람들이지. 그대들의 따뜻한 마음이 이 쉼터를 고치고, 또 우리 마을의 희망을 지탱하는 것이니까!”

보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낡고 부식되었던 기둥은 새것으로 교체되고, 지붕은 튼튼하게 다시 올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장님은 알고 있었다. 정겨운 쉼터는 비단 건축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늘봄리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유쾌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늘봄리 주민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늘봄리의 밤은 잔잔했다. 마을 회관 마당에 켜진 작은 전구들이 아직 남아있는 온기를 비추고 있었다. 이장님은 낡은 자전거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일 아침, 느티나무에 다시 햇살이 내리면, 또 어떤 유쾌한 일들이 늘봄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