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은 깊은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다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머릿속에서는 방금까지 붙잡고 있던 찰나의 영상들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흐릿한 연구실의 풍경, 빽빽하게 들어선 알 수 없는 장치들, 그리고… 한 얼굴.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박혀든 그의 미소와 걱정 어린 눈빛.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입술이 바싹 말랐다. 간절하게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는 턱 끝에서 맴돌 뿐이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어지럼증이 물밀듯 밀려왔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금 낡은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던 참이었다. 주변은 먼지 앉은 책과 고서, 그리고 시대와 상관없이 널브러진 알 수 없는 기계 부품들로 가득한 서재였다. 이곳은 ‘박사님’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피난처이자 연구실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공간 속에서, 오직 리안의 거친 숨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방금 그녀를 휘감았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조각나 있던 기억의 파편이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 한데 모여든 순간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끓어오르는 생명력을 느꼈다.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살아있었다. 온전하게, 사랑하며,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한 이름을 뱉어냈다.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그 이름은 서재의 정적인 공기를 가르고 리안의 온몸을 전율시켰다. 잊고 있던 퍼즐의 가장 중요한 조각이 맞춰진 듯한 기분. 그 이름과 함께, 감정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슬픔,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희미한 희망.
그때, 서재의 낡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박사님이 들어섰다. 그는 잠옷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였지만, 그의 눈은 깊고 예리하게 리안을 꿰뚫어 보았다. 마치 그녀의 격정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리안, 괜찮은가? 자네의 시간 진동이… 심상치 않아서.”
박사님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리안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박사님… 제가… 기억났어요. 그의 이름은 하준이에요. 저희는… 함께 연구했어요. 그 ‘장치’를… 우리가 만들었죠. 시간의 경계를 넘으려고…”
리안의 말을 들으며 박사님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그는 천천히 리안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낡은 의자가 그의 무게에 삐걱거렸다.
“하준… 그래. 마침내 그 이름을 기억해냈군. 자네가 찾아 헤매던, 자네의 과거 속 가장 중요한 존재. 정확히는, 자네의 기억을 잃게 만든 원인이자 동시에 자네를 지켜주려 했던 사람이지.”
박사님의 말에 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인이자… 지켜주려 했다고요?”
“그 장치… ‘시간의 잔해’라고 불렀지, 자네들은. 과거의 잔여 에너지를 응축하여 특정 시간대로 도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꿈의 기계. 하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한 물건이었어. 자네는 그 장치의 폭주를 막으려 했고, 하준 군은… 자네를 지키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감수했지. 자네의 기억 상실은… 일종의 ‘안전 장치’이자 ‘보호막’이었다네.”
박사님의 설명은 흐릿했던 그림에 선명한 윤곽을 더해주었다. 리안은 기억 속 파편들을 다시 짜 맞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 경고음, 하준의 절규, 그리고 자신을 밀쳐내던 그의 손길… 그리고 이어지는 끝없는 어둠.
“그럼… 하준은 어디에 있나요? 그 장치는… 지금 어떻게 된 거죠?” 리안의 목소리는 희망과 절박함으로 뒤섞여 떨렸다.
박사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기억을 잃고 떠돌던 시간 속에서, ‘시간의 잔해’는 완전히 사라졌어. 하지만 그 여파는 남아있었지. 자네가 시간의 흐름을 쫓아 이 시대로 온 것은, 아마도 그 장치의 잔여 에너지에 이끌렸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하준 군은…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하네. 다만, 그 장치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던 그도 시간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지.”
그때였다. 서재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선반 위의 책들이 떨어져 내리고, 낡은 전등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박사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군. 자네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시간의 잔해’의 또 다른 단편이 반응을 시작한 모양이야. 그리고 그 신호는… 오직 자네만을 감지하는 게 아닐세. 다른 시간의 여행자들… 혹은 그 장치를 노리던 세력들이 눈치채기 시작했다는 뜻이지.”
리안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막 되찾은 하준과의 기억이, 다시 위협받는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내면에서 강렬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제가 뭘 해야 해요?” 그녀는 박사님에게 바싹 다가갔다.
박사님은 책상 서랍에서 낡은 통신 장치를 꺼내 리안에게 건넸다. “이건 자네와 ‘시간의 잔해’의 미세한 파장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장치일세. 그리고… 자네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연구실의 좌표를 겨우 찾아냈어. 그곳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어쩌면… 모든 것의 끝일지도 모르지.”
리안은 통신 장치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에 닿았다. 눈앞에 펼쳐진 길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었지만,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렵지만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찾아야 할 이름이 있었다. 지켜야 할 기억이 있었다.
“이번엔… 내가 그를 찾을 차례야.”
그녀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박사님을 바라보았다. 밖은 아직 새벽의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리안은 그 어둠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거의 족쇄는 이제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터였다. 시간의 균열 속으로, 리안의 새로운 여정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