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짙게 깔리는 늦가을 저녁이었다. 창밖으로는 찬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아직 지지 않은 붉은 노을이 유리창에 짧게 매달렸다 스러졌다. 나는 따뜻한 차가 식어가는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싼 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마음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니 애초에 잘못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늘 그랬듯, 내가 가장 나약해지는 순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작은 그림자가 스르륵 다가왔다. 식탁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녀석은 망설임 없이 내 무릎에 제 몸을 기댔다. 보드랍고 따뜻한 털의 감촉이 바지 위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녀석의 이름은 그냥 ‘냥이’. 수많은 이름 후보들을 물리치고 가장 자연스럽게 불리게 된 이름이었다. 수백 번의 계절을 함께 견뎌온 것처럼 익숙한 무게감이 나를 감쌌다.
나는 냥이의 등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냥이는 만족스럽다는 듯 나지막한 골골송을 냈다. 그 소리는 고요한 방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마치 세상을 위로하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냥이의 초록빛 눈동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속에는 수많은 질문과 해답이 공존하는 듯했다. 내가 미처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들까지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냥이야,” 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즘 말이야, 내가 뭘 위해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고, 가끔은 한없이 뒷걸음질 치는 기분이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길이 맞는지조차 모르겠어.”
말을 뱉어내는 순간, 목울대가 울컥 메여왔다. 애써 감추려 했던 마음속의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냥이는 내 얼굴에 제 작은 머리를 가만히 비볐다. 그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털의 감촉, 그리고 이어지는 따뜻한 숨결이 마치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냥이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떤 판단도 비난도 없는, 오직 이해와 공감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다.
나는 냥이의 따뜻한 몸을 품에 안고 녀석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규칙적이고 잔잔한 울림이 내 불안한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냥이는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존재는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강렬한 위로를 전해주었다. 거대한 세상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붙잡아주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다.
“나도 알아, 냥이야. 삶이 원래 다 그런 거겠지.” 내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래도 가끔은 너무 버거워. 모든 게 너무나 불확실하고,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보잘것없게 느껴질 때가 있어.”
냥이는 내 품에서 슬쩍 몸을 비틀더니, 내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그 꺼끌꺼끌하고도 따뜻한 감촉은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너는 여전히 너의 길 위에 서 있어. 발버둥 치는 그 모습 자체가 너의 길을 만들고 있는 거야. 때로는 멈춰 서서 너의 숨결을 느끼고, 이 작은 온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방향을 모르겠다면,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이야.’
나는 냥이의 말없는 메시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거창한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저 오늘, 이 순간을 냥이와 함께 온전히 살아내는 것. 발아래 펼쳐진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를 밟아가는 것. 그것이 이 길고 긴 삶이라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냥이는 내 품에 깊이 파고들어 다시 골골송을 시작했다. 그 따뜻하고 작은 존재가 내게 주는 위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창밖의 어둠을 다시 바라보았다. 더 이상 불안하고 막막하기만 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달과 별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는, 이 모든 것을 함께 견뎌내고 이해해주는 냥이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는 작은 스승. 냥이는 내게 삶의 가장 근원적인 힘을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냥이의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며, 이 작은 숨결이 전해주는 위로를 가슴에 품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