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밤새도록 내려, 오래된 전나무 가지 위에는 새하얀 솜털 모자처럼 쌓여 있었다. 소연은 낡은 나무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난로의 따뜻한 온기가 작은 통나무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시렸다.
어제, 지훈의 담당 의사에게 들었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최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그 잔인한 문장이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고, 곧 돌아가겠다고, 여느 때처럼 환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 미소 뒤에 그토록 깊은 절망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소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탁자 위에는 낡은 일기장과 함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십여 년 전, 바로 이곳, 이 통나무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새하얀 눈밭 위에 나란히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열아홉의 소연과 스무 살의 지훈. 그들의 얼굴 위에는 순수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가득했다. 그들은 눈을 맞으며 서로에게 약속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어떤 계절이 지나도, 우리는 결국 함께 이 눈밭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그 약속은… 우리의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소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약속 이후로 그들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련이 닥쳤다. 오해와 이별, 재회와 또 다른 이별. 그리고 이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이별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낡은 현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찬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어깨와 머리카락에는 눈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소연아, 잠시 나왔다가 들어왔어. 혹시 잠들었을까 봐.”
찬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소연에게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지훈이 아프다는 사실을 소연보다 먼저 알고도, 지훈의 뜻에 따라 침묵을 지켜야 했던 찬우의 고통을 소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찬우야.” 소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 약속… 기억나?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찬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지훈이가 너한테 했던 말, 그리고 너의 대답까지 전부.”
소연은 사진 속의 지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그때 지훈이는 그랬어. ‘우리의 사랑은 이 겨울 눈꽃처럼 영원할 거야. 혹시 우리가 길을 잃어도, 이 눈꽃이 다시 내리는 날에는 반드시 서로를 찾아낼 거야’라고.”
찬우는 소파에 앉아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너는 ‘그래, 약속해. 어떤 일이 있어도 널 놓지 않을게’라고 했지. 그게 너희의 마지막 다짐이었어.”
소연의 눈에서 기어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 애는 날 위해 모든 걸 숨겼어.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 했어. 그런데 나는… 나는 그 아이의 아픔을 알아채지도 못했어.”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찬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이는 듯했다. “지훈이는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너를 너무나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애를 혼자 두게 해야 하는 거야?”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약속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널 놓지 않겠다고.”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던 동공 속에서 결연한 빛을 찾아냈다. 흐르던 눈물도 멎고, 창밖의 눈처럼 차갑게 빛나는 무언가가 그 안에 자리 잡았다. 지훈이 자신을 떠나보내려 해도, 그녀는 절대로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약속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소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소연아?” 찬우가 놀라서 물었다.
“지훈이에게 갈 거야. 그의 곁에 있을 거야. 그가 나를 밀어내더라도, 나는 그 겨울 눈꽃이 다시 내리던 날의 약속을 지킬 거야.” 그녀는 빛바랜 사진을 꽉 움켜쥐었다.
찬우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함께 갈게. 지훈이는 혼자가 아니야.”
소연은 차가운 코트 자락을 여미고 문을 열었다. 눈보라가 다시 거세게 휘몰아쳤지만, 그녀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지훈에게 가야 했다. 그들의 약속이 시작된 날처럼, 눈꽃이 휘날리는 이 겨울날, 그녀는 다시 지훈의 곁으로 돌아가려 했다. 잃어버린 시간, 숨겨진 진실, 그리고 아픔 속에서도, 그들의 약속은 여전히 두 사람의 길을 밝히는 유일한 등불이었다.
“지훈아… 내가 갈게. 내가 너에게 갈게.” 소연의 입술 사이로 간절한 다짐이 새어 나왔다. 눈은 점점 더 거세게 내렸고, 그녀의 발자국은 이내 새로운 눈송이들 아래로 덮여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약속의 불꽃이었다. 희망의 불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