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344화

차가운 금속 냄새가 진동하는 연구실, 시우는 며칠 밤을 새운 듯 눈가가 퀭했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지친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커피잔과 복잡한 수식이 적힌 종이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창밖은 이미 흰 눈으로 뒤덮여 세상과 단절된 듯 고요했지만, 이곳만은 격렬한 생존의 싸움터였다.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스포이드를 든 채, 시우는 유리 용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생명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젠장…”

나지막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밤낮을 바쳐 쌓아 올린 가설들이 다시 한번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중요한 데이터 하나가 예상 경로를 벗어났고, 그것은 전체 연구의 방향을 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암시였다.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온전한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연구실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우는 돌아보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한 교수님,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금은 어떤 방해도…”

“방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시우야.”

익숙하면서도 애틋한 목소리에 시우의 몸이 경직됐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차가운 연구실 공기마저 포근하게 감싸 안을 듯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은채였다. 그녀의 코트에는 밖에서 붙어왔을 작은 눈꽃들이 아직 녹지 않은 채 반짝였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보온병과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또 밤샘 작업 중이었니?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지.”

은채의 목소리는 너무나 잔잔해서, 시우의 마음속 격랑을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굳게 닫혔던 감정의 문이 열리려는 것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여긴 왜… 여기까지 찾아왔어.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지 알잖아.”

“알지. 네가 얼마나 이 연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지. 그래서 더 걱정돼. 너까지 쓰러지면 누가… 누가 끝까지 버틸 수 있겠어.”

은채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고소한 수프 냄새가 연구실의 금속 냄새를 희미하게 밀어냈다. 시우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냄새를 맡았다. 배고픔조차 잊고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네가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않고 지새운 시간이 몇 주째인데. 이러다 정말 큰일 나. 그 아이를 위한 일이라지만, 너 자신도 소중하잖아.”

‘그 아이’. 은채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시우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아이를 위해 시작된 일, 그리고 그 아이에게 약속했던 그날의 맹세. 시우는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쩌면 그 맹세의 본질을 잊고 표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시우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은채는 그런 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비난이나 좌절이 아닌, 깊은 이해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멈추라는 게 아니야. 다만, 잊지 말아 달라고.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는 그저 병을 고치는 것만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잖아.”

은채의 말은 시우의 굳게 닫힌 마음을 강타했다. 잊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

시간은 흘러 계절이 수없이 바뀌고 눈꽃이 셀 수 없이 내렸지만, 어떤 기억들은 영원히 얼어붙은 채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던 어느 겨울날. 아직 어린 시우와 은채, 그리고 병색이 짙었던 은채의 동생 하진이 함께 있었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하진은 작게 기침을 했다. 얇은 이불 속에서도 하진의 몸은 열로 뜨거웠다. 시우는 그 작은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진아, 뭐가 가장 먹고 싶어? 형이 나중에 꼭 사줄게.”

하진은 맑은 눈으로 눈 내리는 창밖을 가리켰다. “형아… 나는 있잖아… 눈밭에서 뛰어노는 게 제일 하고 싶어. 병원에서 저렇게 예쁜 눈꽃이 내리는 걸 보는 것 말고… 직접 만져보고 싶어.”

어린 시우는 그 소망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하진은 겨울이 올 때마다 더 약해졌다. 그 해 겨울은 특히 더 매서웠다. 시우는 하진의 작은 손을 더 꼭 잡으며 맹세했다.

“하진아, 걱정 마. 형이 꼭 방법을 찾을게. 다음 겨울엔 꼭 너랑 같이 눈밭에서 뛰어놀 거야. 병 같은 건 다 사라지게 할 거야. 그래서 너처럼 아픈 사람이 다시는 이 세상에 없게 할게. 이 눈꽃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모두가 웃을 수 있도록… 형이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은채는 그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시우와 하진의 손을 함께 잡았다. 그들의 작은 손은 차가운 세상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유일한 불씨였다. 그리고 그날, 하진은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주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었다. 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삶, 그리고 모든 아픔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미래. 그것이 그들이 함께 품었던 간절한 소망이었다.

***

차가운 연구실로 돌아온 시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진의 마지막 웃음과 그날의 약속은, 그에게 삶의 이유이자 족쇄였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쫓는 것이 과연 하진이 원했던 그 ‘웃음’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이기적인 집착이었을까.

“시우야.”

은채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손이 시우의 어깨에 조용히 닿았다.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하진이는… 병이 낫는 것만큼이나,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꿨어. 네가 지금 만드는 것이 설령 병을 고치는 완벽한 해답이 된다 해도, 만약 그것이 누군가를 또 다른 방식으로 아프게 한다면… 과연 하진이가 기뻐할까?”

은채의 말은 비수처럼 시우의 가슴에 박혔다. 최근 그가 직면한 윤리적 딜레마를 정확히 꿰뚫는 말이었다. 그가 개발 중인 혁신적인 치료법은 분명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극심한 부작용, 혹은 소수에게 가해질 위험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데이터를 조작하거나, 일부분을 숨긴 채 발표를 강행하라는 압박도 있었다. 성공에 눈이 멀어 타협하려는 유혹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그 순간, 연구실 문이 다시 열리고 한 교수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예상치 못한 심각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시우 박사. 방금 본부에서 연락이 왔네. 자네 연구 결과에 대해 긴급 브리핑을 요구하고 있어. 투자자들의 압박이 심한 모양이야. 오늘 안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네.”

한 교수의 말은 시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은채는 불안한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온 약속. 그 약속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차가운 눈꽃이 창밖으로 계속 흩날리고 있었다. 시우는 다시 자신의 연구 결과가 담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숫자들이 무표정하게 깜빡이고 있었지만, 시우의 눈에는 하진의 웃음과 은채의 걱정, 그리고 그 겨울날의 순수한 맹세가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