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343화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했다. 지우의 작은 원룸 안,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은 책상 위의 스탠드와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푸른색 주파수 창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지우는 따뜻한 차가 담긴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서른네 번째 계절의 삼백사십세 번째 밤입니다. 깊어가는 이 밤, 외로운 마음을 별빛으로 채워줄 오늘의 사연은요…”

DJ 강석의 나긋하지만 깊이가 있는 목소리는 늘 그랬듯, 차분하게 밤의 공기를 가르고 지우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때로는 다정한 연인처럼 지우의 밤을 지켜왔다. 오늘의 사연은 첫사랑과의 추억에 대한 것이었다. 별을 보며 나누었던 풋풋한 약속들, 서로의 꿈을 응원했던 순수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지우는 눈을 감았다.

그 밤의 별똥별

시간은 언제나 기만적이다. 선명하게 박제된 것처럼 보이던 기억마저도,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빛바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기억들은, 특정 소리나 향기, 혹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작은 불씨 하나로도 순식간에 활활 타오른다. 지금 지우에게는 DJ 강석의 목소리가 그러했다.

“지우야, 저 별 보여? 쌍둥이자리 옆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저 별.”

회색빛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민준은 검지 손가락으로 밤하늘의 한 점을 가리켰다. 스무 살의 여름, 찜통 같은 도시의 열기가 밤에도 식지 않던 그 날, 두 사람은 돗자리 하나 깔고 누워 밤늦도록 별을 헤아렸다. 시원한 맥주 한 캔과 눅눅해진 치킨 조각들이 그들의 낭만을 채웠다.

“응, 보여. 왜? 저 별한테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 지우는 고개를 젖히고 민준이 가리킨 곳을 따라갔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희미했지만,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는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저 별, 우리 별 하자. 어때?” 민준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우리 헤어져도, 저 별 보면 서로 생각나는 거 아니겠어?”

그때의 지우는 민준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헤어진다는 농담조차 받아들이기 싫을 만큼,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푸른 하늘 아래서 함께 꿈을 꾸고,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에게 별이 되어주자던 약속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밤은,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민준은 졸업 후 유학을 떠났고, 자연스레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졌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울리던 국제전화 벨소리도, 간절했던 영상 통화도, 어느새 뜸해졌다. 시차보다 더 큰 시차가 그들 사이에 놓였다. 서로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삶의 속도. 결국 마지막 통화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신, 조용히 이별을 고했다.

“괜찮아, 민준아. 우리 둘 다, 잘 지낼 거야. 각자의 별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또 다시 마주칠 수도 있겠지.”

그날 밤, 지우는 처음으로 옥상에 혼자 올라가 민준과 ‘우리 별’이라고 불렀던 그 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빛나던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빛은 더 이상 예전처럼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고, 멀고, 잡히지 않는 빛이었다.

별이 되는 시간

DJ 강석의 목소리가 다시 현재로 지우를 불러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추억은 때로 가슴 한편을 시리게 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시림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나를 지탱해주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신청곡은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아픔을 보듬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잔잔한 기타 선율과 김광석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우는 눈을 떴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 몇 개가 보였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별들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어느새 이별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지우는 민준이 없는 삶에 익숙해졌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사유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때로는 외로웠고, 때로는 과거의 선택에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그녀는 한 뼘 더 단단해졌다. 누군가의 별에 기대지 않고도,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법을 배웠다.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창에 손가락을 댔다. 문득 민준이 ‘우리 별’이라고 했던 그 별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옥상 난간이 아닌, 혼자 걸어 올라간 동네 뒷산 정상에서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 별은 이제 더 이상 ‘그와 나의 별’이 아니라, ‘나의 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지우 자신도 그렇게 수많은 다른 존재들 중 하나로, 각자의 궤도를 따라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끝나고, 강석 DJ의 차분한 클로징 멘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삶은 때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별은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봅니다. 여러분의 밤하늘에도 언제나 희망의 별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강석이었습니다. 내일 밤 같은 시간에 다시 만나요.”

지우는 라디오의 전원을 끄지 않았다. 다만 볼륨을 낮추어 흐릿하게 이어지는 다음 곡을 들으며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차가운 유리창에 비친 지우의 눈동자에는, 오늘 밤 들었던 사연 속 슬픔이 아닌, 알 수 없는 잔잔한 빛이 어려 있었다. 내일은 동네 뒷산에 올라가 봐야겠다. 혼자서, 오롯이 나의 별을 찾아보러. 그녀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별이 빛나는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