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가르는 차가운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유리창에 맺힌 희미한 성에 사이로, 아직 완전히 어둠이 걷히지 않은 하늘이 옅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지원은 침대 옆 바닥에서 곤히 잠든 보미를 내려다보았다. 보미의 작은 몸은 담요 속에 포근히 파묻혀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요 며칠 보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아침 일찍부터 쫑긋 세운 귀로 지원을 깨우고, 조잘거리듯 하루를 시작할 보미였다.
“보미야, 괜찮아?”
지원1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보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초롱초롱하던 눈빛은 짙은 피로를 머금고 있었다. 보미는 작게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지원… 엄마… 좋은 아침…”
평소 또렷하던 발음이 어딘가 흐리고, 목소리에는 미세한 갈라짐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소리처럼 불안했다. 지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보미의 이 특별한 능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 능력 때문에 보미가 아픈 것은 아닌지, 지난 밤 내내 악몽처럼 그녀를 괴롭혔던 생각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의 그림자
“어제는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걸려온 혜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예리하게 들렸다. 혜진은 지원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였다. 그래서 어쩌면 보미의 비밀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라니? 아무 일도 없었어.”
지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혜진의 질문에는 분명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아니 글쎄, 너 어제 퇴근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보미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막 들어가려는데 보미가 갑자기 엄청 격렬하게 짖으면서 너 다리 사이로 숨더라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그러니? 평소 같으면 꼬리 살랑거리고 달려왔을 애가 말이야. 너한테 안기면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꼭 뭐라고 하는 것 같았어. ‘위험해, 조심해!’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혜진의 말에 지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제 저녁, 분명 보미는 혜진을 보자마자 지원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지원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던 보미의 목소리가 있었다.
“엄마, 쟤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 뭔가 이상해.”
지원은 그저 보미가 낯을 가린다고 둘러대며 혜진을 안심시켰지만, 사실 보미의 경고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보미는 평범한 개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미묘한 에너지나 감정을 읽어내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혜진을 향한 보미의 반응은 전에 없이 강렬했다.
“아냐, 그냥 보미가 어제 좀 예민했나 봐.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지원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혜진은 의심스러운 듯 “그래? 어쩐지 요즘 보미가 너무 사람 같더라.”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한 마디가 지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비밀의 끈이 점점 더 위험하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가라앉는 목소리
퇴근 후, 지원은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보미가 힘없이 걸어 나왔다. 보통 때 같으면 힘껏 뛰어와 안겼을 보미였다. 보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걸음걸이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지원은 서둘러 보미를 안아 올렸다. 보미의 작은 몸은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다.
“보미야! 괜찮아? 어디 아파?”
지원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보미는 지원의 품에 안겨 가늘게 떨었다. 힘겹게 숨을 고르던 보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엄마… 머리가… 너무 아파…”
그 말을 끝으로 보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지원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보미는 의식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지원은 급히 보미를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보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비밀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예리한 시선
24시 동물병원 대기실. 지원은 초조하게 초침 소리를 세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무거운 담요에 싸인 보미가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것도 들키지 않게…’ 지원은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보미의 증상은 평범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개가 사람처럼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잠시 후, 김 원장이 들어왔다. 나이 지긋한 김 원장은 조용하지만 예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보미를 품에 안은 지원을 잠시 응시하더니, 조심스럽게 보미를 건네받았다.
“음… 특이하네요.”
김 원장은 보미의 눈을 살피고, 심장 소리를 듣고, 온몸을 촉진했다. 그리고는 뇌파 검사 준비를 지시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겉으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영리하네요. 눈빛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릅니다. 고통을 참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를 이해하고 있는 듯한…”
김 원장의 말에 지원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그가 보미의 특별함을 알아채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지원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원래 좀 똑똑한 아이예요.”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런데 이 아이, 잠시 전 복도에서 당신이 안심시키듯 말하자,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기분 탓이겠죠.”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보미는 분명 지원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김 원장의 통찰력은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지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 정말 선택의 기로에 놓인 듯했다.
무거운 진실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지원은 보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보미는 아직 의식이 없었지만, 작은 앞발이 지원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힘없이 잡고 있었다. 지원은 보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참았다.
‘보미야, 제발 괜찮아야 해. 엄마가 너를 지켜줄게.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너의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할게.’
그때, 보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천천히 뜨였다. 그녀의 눈은 흐릿했지만, 지원을 향한 깊은 사랑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원의 귀에, 너무나도 희미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는…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
지원2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소리야, 보미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보미는 힘들게 미소 지었다. “내 안에… 너무 많은 소리가… 엉켜 있어…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어…”
보미의 특별한 능력은 단순히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모든 소리, 감정, 에너지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 방대한 정보가 그녀의 작은 몸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말’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힘이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야, 보미야… 네가 없으면 엄마는…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
지원2는 보미를 꼭 안았다. 따뜻하고 작은 몸이 지원의 품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원은 눈물을 쏟아냈다. 보미는 그런 지원의 눈물을 핥아주려 애썼지만, 이미 기력이 다한 듯 움직임이 둔했다.
“엄마… 괜찮아… 내가… 너의… 옆에… 있을게…”
그것이 보미가 지원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눈이 다시 감겼고, 그녀의 작은 몸에서는 더 이상 미세한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원은 보미를 더 세게 안았다. 차가운 병실 안, 오직 지원의 흐느낌만이 길고 길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손안에 쥐어진 보미의 작은 발바닥은 마치 뜨거운 심장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작은 생명을 위해서라면, 지원은 세상의 어떤 위험과도 기꺼이 맞설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이 비밀은 그녀의 전부이자, 그녀의 가장 큰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