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55화

차고 건조한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오래된 아파트의 창문은 아무리 닫아도 어딘가 빈틈이 있었고, 그 작은 틈새로 들어온 겨울의 날숨이 실내의 온기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했다. 지영은 손에 든 따뜻한 머그컵을 꽉 쥐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컵 속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 가상의 온기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착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는 그녀의 등 뒤로, 온몸을 웅크린 채 낮잠을 즐기던 사비가 스르륵 눈을 떴다. 얇은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지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기운. 익숙한 듯 낯선 그림자가 지영의 어깨를 덮고 있었다.

“사비야.”

지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사비는 작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길게 뻗은 몸은 탄력 있었고, 늘 그랬듯 우아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와 지영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게감이 지영의 허벅지에 실리자, 왠지 모르게 불안정했던 그녀의 마음이 아주 미세하게 균형을 되찾는 느낌이 들었다.

“너도 알고 있지?”

지영은 사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 속에 숨겨진 단단한 두개골의 감촉이 편안했다. 사비는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지영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것은 지영의 말에 대한, 고양이식의 가장 깊은 공감 표현이었다.

오래된 숲의 노래

며칠 전, 지영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 동네의 재개발 계획이 확정된 것이다. 그녀가 나고 자란 이 낡은 아파트는 물론, 사비와 처음 만났던 오래된 골목과 그 옆을 지키던 허름한 슈퍼마켓까지, 모든 것이 사라지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재개발 지역 내 새 아파트에 입주할 권리를 얻거나, 이주 보상금을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전자는 익숙한 공간이 완전히 변형된 곳에 머무는 것이었고, 후자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낯선 시작을 택하는 것이었다. 어느 쪽도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비야? 이 동네는… 나에게는 너를 만난 곳이고, 우리 아빠와의 마지막 추억이 깃든 곳인데.”

지영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겨울바람에 흐느끼듯 흔들리고 있었다. 저 나무들도, 저 아래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언젠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익숙한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익숙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비는 지영의 무릎 위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후, 사비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지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영은 그 눈빛 속에서 사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구나. 하지만 기억해라, 지영아.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만, 그 뿌리는 흙을 찾아 깊이 파고든다. 흙이 바뀌어도, 뿌리가 닿을 곳은 항상 존재한다.’

사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숲의 고요함처럼 깊은 울림이 있었다. 지영은 숨을 들이켰다. 뿌리. 그녀는 자신의 뿌리가 이 동네에 너무 깊이 박혀있어, 그것을 뽑아내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면 너와 함께하기 어렵지 않을까? 새로운 곳에서 내가 너를 돌볼 수 있을까?”

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사비였다. 새로 지어질 아파트에서는 고양이를 키우기 어려울 수도 있었고, 새로운 환경에 사비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길고양이로 살아온 사비에게는 익숙한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그녀는 늘 믿어왔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비는 지영의 무릎에서 내려와 창가로 총총 걸어갔다. 그리고는 창밖의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지저귀는 모습,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 사비의 시선은 마치 이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듯 진지했다. 그리고는 다시 지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흐르지만, 그 강물이 지나온 자리마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난다. 멈춰 있으면 썩어버리는 것이 물의 운명이다. 너의 삶 또한 강물과 다르지 않다.’

지영은 사비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멈춰 있으면 썩어버리는 물. 그녀는 이 동네에 너무 오래 머물러, 어쩌면 그녀의 삶 또한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녀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작은 섬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사비가 그녀를 이 섬에서 벗어나게 해 줄 등대 같은 존재였을까?

“떠나는 것이 답이라는 거야?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나에게는 너무 큰 모험인데.”

사비는 지영의 발치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리고는 앞발로 지영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마치 ‘이것 보렴’ 하고 말하는 듯했다.

‘모험이 두렵다면, 시작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발이 가는 곳에 내가 있다. 너의 마음이 닿는 곳에 내가 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강물이 흐르게 하라. 그때도 나는 너의 곁에서, 네가 어디로 흐르든 함께할 것이다.’

지영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사비는 언제나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주었다. 이 작은 길고양이가, 그녀의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려움, 그녀의 망설임, 그리고 그녀의 숨겨진 용기까지도.

그녀는 천천히 몸을 굽혀 사비를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이 얼굴에 닿았다. 사비는 작게 울음을 터뜨리며 지영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그 작은 울음소리가 지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닿아, 얼어붙었던 심장을 녹이는 듯했다.

“고마워, 사비야. 네가… 네가 언제나 나의 길을 보여주는구나.”

지영은 한참 동안 사비를 안고 있었다. 창밖의 겨울 풍경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새로운 뿌리를 내릴 용기.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을 용기. 그리고 그 모든 여정 속에 사비가 함께할 것이라는 변치 않는 믿음.

그녀는 결심했다. 오래된 것을 떠나보내고, 미지의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그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지영은 사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비 역시 그녀를 올려다보며, 초록빛 눈동자로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들의 대화는 끝났지만,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새로운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