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내린 시간, 낡은 가로등 불빛 아래 ‘꿈을 파는 상점’이라는 간판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닳아 해진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익숙하면서도 늘 낯선 공간의 향기가 서연을 감쌌다. 오래된 책과 말린 허브,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의 은은한 내음이 뒤섞인 듯했다. 상점 안은 고요했고, 천장의 수백 개의 유리병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부유하는 꿈의 조각들을 담고 있었다. 옅은 파스텔 톤에서 깊은 밤하늘의 색까지, 병 속의 꿈들은 마치 살아있는 은하수 같았다.
“오셨군요, 서연 씨.”
안쪽 깊숙한 곳, 낡은 나무 카운터 뒤에서 몽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희망과 절망을 보아온 자의 깊은 통찰이 배어 있었다. 희끗한 머리카락과 깊은 눈매는 그가 평범한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심장은 마치 꿈의 조각들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오랫동안 피하고 싶었던, 그러나 결국 마주해야만 할 꿈.
“준비된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 꿈은 달콤함 뒤에 숨겨진 진실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깨어나면 더욱 쓰라릴 수도 있습니다.”
몽상가는 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두려움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 몇 년간, 그녀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책감과 후회는 이제 그녀의 삶을 잠식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동생, 지수를 잃은 후로 단 한 순간도 편안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날의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고, 서연은 자신이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지수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환영에 시달렸다.
“괜찮아요.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어떤 진실이라도 좋으니, 마주하고 싶어요. 제가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수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지 보고 싶어요.”
몽상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다른 병들과는 달리, 이 병은 어떤 색깔도 띠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을 뿐이었지만, 병 주변으로는 아지랑이처럼 옅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미묘한 빛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의 박동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만약의 시간’을 담은 꿈입니다. 과거의 한 순간, 당신의 선택이 달라졌을 때 펼쳐질 미래의 조각들을 보여줄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서연 씨. 꿈은 현실을 바꾸지 못하지만, 현실을 살아갈 힘을 줄 수는 있습니다.”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아 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병의 감촉이 오히려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몽상가는 그녀를 상점 한쪽에 마련된 안락의자로 안내했다. 부드러운 천으로 덮인 의자에 앉자, 그녀는 몽상가가 건네주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허브 향이 코끝을 스쳤다.
“편안하게 몸의 모든 긴장을 푸세요. 그리고 이 꿈을 받아들이세요. 저항하지 마세요. 오직 당신만이 그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몽상가의 지시에 따라 서연은 병의 마개를 열었다. 안에서 아무런 냄새도,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액체만이 잔잔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병 안의 액체를 천천히 마셨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일순간 마비되는 듯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쿵, 쿵, 하고 울렸다.
그리고,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뜬 곳은 낯익은 풍경이었다. 햇살 가득한 여름날의 한강 공원.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강물은 반짝이며 흘러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젊은 연인들의 속삭임, 그리고… “언니!”
뒤돌아본 서연의 눈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달려오는, 밝게 웃는 얼굴. 지수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지수가 생생하게 그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사고가 나던 그날의 모습이 아닌, 한층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언니,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다들 기다리잖아!”
지수는 서연의 손을 잡고 익숙하게 끌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던 자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지수는 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연은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온몸을 휘감는 이 생생한 감각에 저항할 수 없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지수의 목소리, 그녀의 표정, 함께 걷는 잔디밭의 감촉까지도.
두 사람은 돗자리가 펼쳐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부모님과 지수의 남자친구,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 아래, 행복이 넘쳐흐르는 풍경. 그 안에서 지수는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밝은 미소로 모두를 즐겁게 했다. 서연은 그 모든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언니, 왜 아무것도 안 먹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인데!”
지수가 튀긴 닭다리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연은 닭다리를 받아 들고서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지수의 얼굴을, 그녀의 웃음소리를, 살아있는 지수를 눈에 담기에 바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현실보다 더 강렬하게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모두가 떠난 자리. 서연과 지수는 나란히 앉아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강물 위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하늘의 별처럼 아롱거렸다.
“언니, 오늘 너무 즐거웠어. 요즘 언니 좀 힘들어 보였는데, 오늘 조금이라도 웃어서 다행이야.”
지수의 다정한 목소리에 서연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억지로 참아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지수는 놀란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지수의 품은 서연이 그토록 갈망했던 위안이었다.
“지수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서연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잠겼다. 하지만 지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언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언니는 항상 나를 지켜줬잖아. 힘들 때마다 내 옆에 있어줬고, 내가 잘못하면 꾸짖어줬고. 나에게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언니야. 언니는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어.”
지수의 말은 서연의 가슴 깊이 박혀있던 죄책감의 덩어리를 조금씩 녹여내리는 듯했다. 지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언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언니를 사랑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언니는 행복하게 살아야 해. 나를 위해서라도, 언니를 위해서라도.”
서연은 고개를 들어 지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고 깊었다. 그 안에는 서연이 기억하는 어린 지수의 순수함과, 그녀가 알지 못했던 성숙한 여인의 지혜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수가 살아 있었다면 그녀에게 해주었을 말, 그녀가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며, 강물 위로 붉은 빛이 번져나갔다. 지수의 모습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녀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안녕, 언니. 사랑해.”
마지막으로 지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그녀의 모습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졌다. 서연은 허망하게 손을 뻗었지만,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살아 있는 지수를 만났던 행복과 그녀를 다시 잃어야 하는 슬픔 사이에서 한없이 울었다.
***
서연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다시 꿈을 파는 상점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축축했고, 눈은 실컷 울어 부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뻥 뚫린 듯한 허무함과 함께, 묘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몽상가가 따뜻한 물수건을 건넸다.
“돌아오셨군요.”
서연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지수의 따뜻한 체온과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몽상가를 바라보았다.
“그 꿈은… 지수가 정말 저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을까요?”
몽상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꿈은 때로 현실이 전하지 못한 진심을 담아옵니다. 당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지수의 사랑이, 그 꿈을 통해 발현된 것이겠지요. ‘만약의 시간’은 단지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연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지수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쳤지만, 더 이상 그녀를 짓누르던 죄책감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수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 사실은, 꿈속에서나마 지수가 직접 전해준 진심이었다. 이제 그녀는 지수가 남기고 간 사랑을 붙들고 현실을 살아낼 용기를 얻은 듯했다.
상점 밖으로 나오자, 밤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서연은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더 이상 꿈에 의지하여 과거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수가 보여준 미소, 그녀가 전해준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씨앗이 되어줄 터였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만약의 시간’에 머무르지 않고, 지수와 함께 나눌 수 없었던 미래를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나갈 준비가 되었다. 꿈을 파는 상점의 희미한 불빛은 그녀의 등 뒤로 점점 멀어졌지만, 서연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은 끝났지만, 삶은 이제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