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의 발걸음은 낡은 금속 복도를 따라 울려 퍼졌다. 사방을 둘러싼 냉담한 회색 벽과, 천장의 비상등이 깜빡이며 던지는 불안정한 빛은 그녀의 존재감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폐허가 된 시간 연구소, 그녀의 기억 속 단편들이 끊임없이 이끌었던 종착역이었다. 손목의 시간 동기화 장치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희미한 심장이 박동하듯, 잊힌 과거의 조각들이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이곳인가.”
목소리는 공기 중에 희미하게 흩어졌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간을 헤맸는지, 기억조차 온전치 않은 그녀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텅 빈 듯한 내면의 공허함만이 이 길고 지루한 방랑의 무게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차가운 벽면을 쓸어보았다. 과거의 흔적들은 깊이 잠든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숫자들, 알 수 없는 기호들은 뇌리를 스치는 찰나의 이미지들과 미약하게 겹쳐졌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이곳으로 돌아온 것일까.
시간 연구소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붕괴된 천장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일부 구역은 중력 이상 현상으로 인해 공간 자체가 뒤틀린 듯 보였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미래와 과거의 파편들이 그녀의 의식에 섬광처럼 부딪혔다. 파동치는 기억의 조각들, 찢겨진 사진처럼 불완전한 잔상들… 한 남자의 웃음소리, 작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던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아있는, 알 수 없는 재난의 섬광.
마침내 그녀는 거대한 이중 잠금문 앞에 섰다.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된 듯 보였지만, 손목의 장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며 문틈 사이로 푸른빛을 뿜어냈다. 기억은 없지만, 이 장치는 분명 그녀의 일부였다. 그녀는 장치를 문에 갖다 댔다. 낡은 금속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곳은 메인 제어실이었다. 거대한 홀 중앙에는 비활성화된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우뚝 서 있었고, 벽면에는 수많은 모니터들이 꺼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서하는 홀로그램 프로젝터 앞으로 다가섰다. 손을 뻗어 먼지 쌓인 표면을 쓸자, 거짓말처럼 희미한 불빛이 번쩍이며 시스템이 깨어났다. 투명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허공에 펼쳐졌다. 처음에는 의미 없는 데이터와 코드들이 흐르다, 이내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생기 있고, 희망에 차 있는 모습.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강준. 뇌리를 스치는 이름에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따뜻한 눈빛, 다정한 미소. 아득하고 아련한 기억의 파편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의 시선은 한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미래.
“미래…”
서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름은 메아리가 되어 홀을 맴돌았다. 아이의 환한 웃음소리가 기억의 심연에서 솟아나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그리고 강준이 자신의 연인이자 동료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모든 과거가 한꺼번에 그녀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행복했던 시간들, 함께 나눴던 꿈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앗아간 재앙의 순간까지.
홀로그램 화면 속에서, 과거의 서하와 강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는 거대한 시간 증폭 장치가 굉음을 내며 가동되고 있었다. 화면 속의 과거의 서하는 초조하게 장치를 바라보다가, 강준에게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입모양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희생’, ‘최후의 방법’, ‘미래를 위해’.
그리고 곧, 화면은 붉은 섬광으로 뒤덮였다. 시간 증폭 장치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분출되었고, 모든 것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파동이 연구소를 뒤흔들었다. 화면 속의 강준은 필사적으로 서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입모양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돌아가… 서하… 미래를… 지켜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강렬한 에너지 파동 속에, 과거의 서하가 자신의 손목 장치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모습은 홀로그램 속에서 사라졌다.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지워진 것처럼.
“아…”
서하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도망쳤던 것이다. 아니,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기억을 지운 채 시간의 파동 속으로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 재앙의 순간, 그녀의 몸을 덮친 에너지는 단순한 시간 이동이 아니었다. 기억의 소실은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지웠던 것이다. 소중한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을 잃었던 것이다.
홀로그램 화면은 다시 정지된 채 과거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연구소, 강준의 절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마른 심장에 비로소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그 기억은 상실의 아픔만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지키려 했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딸, 미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갑자기, 홀로그램 화면이 다시 깜빡이며 경고음을 울렸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시간 증폭 장치의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그래프였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에너지 수치. 그리고 그 아래 작게 쓰여진 문구. ‘시간 복구 불능. 마지막 시퀀스 발동 임박.’
“안 돼… 아직은…”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가 저질렀던 일, 그녀가 막아야 할 일, 그리고 그녀가 지켜야 할 모든 것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그녀는 일어나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했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비로소 단단한 결의로 타올랐다. 그녀는 시간의 파편 속으로 다시 뛰어들 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기억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의 시간 여행은 이제, 진정한 의미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