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한은 오래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낡은 종소리가 띠링, 하고 울리며 그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작은 시골 도시의 이름 없는 골목에 숨어 있는 ‘추억 카페’라는 간판은 오랜 비바람에 글자가 희미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그가 수백, 수천 개의 단서를 쫓아온 여정의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 직감했다.
카페 내부는 옅은 커피 향과 오래된 나무 가구 냄새가 뒤섞여 아늑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 창밖으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먼지 낀 공기 속에서 유영했다. 창가 자리에는 이미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남색 스웨터를 입고,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 테이블 위에는 그가 보낸 짧은 메시지 속에서 언급했던, 낡은 시집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박미경 씨. 그녀가 맞았다.
태한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박미경 씨 되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어딘가 체념한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눈가에는 잔잔한 주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네. 강태한 씨 맞으시죠?”
그녀가 조용히 답했다. 태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앞에서 수많은 질문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373번째 챕터에 이르도록, 단 하나의 이름, 윤서영. 그 이름 석 자를 쫓아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 개의 그림자
“서영이 이야기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많을지 모르겠네요.” 미경 씨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알던 서영이는 늘 그림자 같았어요. 조용하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주 깊은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죠.”
미경 씨는 태한이 몇 년 전 이 작은 마을에서 서영이가 잠시 머물렀다는 단서를 찾아냈을 때 알게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서영이가 작은 공방에서 수공예품을 만들며 생활했던 시절, 그녀와 함께 일했던 동료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태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살아가고 있었어요.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처럼 보였죠. 손재주가 좋아서 예쁜 것을 많이 만들었지만, 그 작품들마저도 어딘가 쓸쓸함이 배어 있었어요.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 노력했지만, 늘 한 발짝 떨어져 있었죠. 마치 누군가에게 상처 줄까 봐, 혹은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요.”
태한의 가슴이 저며 왔다. 그가 기억하는 서영이는 밝고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꽃을 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 그의 품에 안겨 세상이 전부인 듯 속삭이던 그의 첫사랑. 그녀가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기에, 타인의 눈에 ‘그림자 같은 슬픔’을 지닌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을까.
“저에게… 그녀는 늘 미안해하는 것 같았어요.” 미경 씨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엇이 미안한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끔 그녀의 눈에서 아주 오래된 그리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을 보곤 했죠. 마치,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요.”
“제 이름은… 혹시 언급한 적이 있었나요?” 태한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
미경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는 없었어요.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밤늦게까지 공방에 남아 홀로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그때 그녀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늘 한 남자의 뒷모습이 있었어요. 저에게 보여준 적은 없지만, 우연히 본 적이 있었죠.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아련한 슬픔으로 가득했고요.”
태한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 남자의 뒷모습이 혹시 자신은 아니었을까. 아니, 분명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서영이도 그를 잊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서로의 잔상 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두 영혼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듯했다.
새로운 단서, 새로운 길
“그녀가 이 마을을 떠날 때, 제게 이것을 건네주었어요.”
미경 씨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낡은 목함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태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함 속에는 몇 개의 작은 수공예품과 함께, 낡은 편지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떠난 지 벌써 5년이 넘었어요. 이 편지는 제게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제게 맡긴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녀가 떠난 후, 제가 그 사람과 연락이 닿질 않아서… 결국 지금까지 제가 보관하고 있었죠. 강태한 씨라면, 이 편지의 주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태한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받아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옅게 바랜 글씨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김정은 선배께.
김정은. 태한의 기억 속에서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미경 씨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녀가 대학 시절 가장 의지했던 선배라고 했어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늘 정은 선배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다고… 서영 씨가 이곳을 떠날 때, 정은 선배에게 잠시 머물 곳을 부탁할 예정이라고 말했어요.”
이것은 단순한 단서가 아니었다. 373화에 이르러 그가 마주한, 서영이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따뜻한 손길이었다. 수년 간의 수색 끝에, 비로소 그는 서영이가 의지했던,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태한은 편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경 씨의 눈에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부디… 그녀를 찾아서, 그녀의 그림자를 거두어 주세요.”
그녀의 부탁에 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김정은. 이제 그의 다음 여정은 그 이름 석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서영이가 의지했던 사람이라면, 분명 서영이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랜만에 뜨거운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영이의 흔적을 쫓는 긴 여정의 끝이, 어쩌면 저 편지 속 이름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예감과 함께.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향한 그의 집념은, 그 어떤 피로도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