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침부터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지은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잿빛으로 물든 바깥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가슴을 짓누르던 먹먹함이 빗줄기처럼 심장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손안에 든 낡은 사진 한 장. 빛바랜 그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지은과 커다란 살구나무 한 그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래된 집이 팔리고, 그와 함께 마당 한가운데 수십 년을 버텨온 살구나무도 사라질 것이라는 소식은 지은에게 예상보다 훨씬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나무 한 그루가 아니었다. 햇살 좋은 날이면 그 그늘 아래에서 동화책을 읽었고, 여름이면 땀 흘리며 살구를 따 먹었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만으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주던 존재였다. 지은의 모든 유년이 그 나무에 깃들어 있었다.
“지은아,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아니, 정확히는 음성이라기보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에 가까웠다. 창밖의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릴 법도 했지만, 그 소리는 언제나 지은의 마음 가장자리를 조용히 어루만졌다. 고양이 하늘이였다. 녀석은 지은의 무릎 위로 조용히 뛰어올라 웅크렸다. 말없이 지은의 손을 핥고는, 이내 금빛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봤다.
“하늘아…”
지은은 젖은 눈으로 하늘을 마주했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무릎을 통해 스며들어 차가웠던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하늘의 눈빛은 언제나 그랬듯 너무나도 고요하고, 깊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과 기쁨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그 눈빛에 지은은 자신의 슬픔을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살구나무… 이제 곧 사라진대.” 지은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내 전부였는데.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주던 나무였는데. 그 나무가 없으면, 내 기억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하늘은 지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지은의 뺨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그 털의 감촉은 마치 오랜 위로처럼 따뜻했다. 지은은 하늘을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녀석의 옅은 털 냄새와,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라지는 것은 없어. 형태가 변할 뿐.
그녀의 마음속에 하늘의 목소리가 울렸다. 단순한 언어가 아니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과 이미지들의 연속이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오랜 세월 한 자리에 뿌리내려 서 있는 모습, 그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 여름의 소나기, 겨울의 흰 눈. 그리고 그 나무를 둘러싸고 피어났던 수많은 생명들. 작은 벌레들, 새들,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늘은 지은의 품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다시 다가섰다. 녀석은 창밖의 빗줄기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시선은 비록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햇빛을 쫓는 듯하기도 했고, 비록 형체가 사라져도 영원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찾는 듯하기도 했다. 이내 하늘은 다시 지은을 돌아보았다. 금빛 눈동자 속에서, 지은은 수많은 계절의 변화와 순환을 읽어내는 듯했다.
생명은 돌고 도는 거야. 나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에서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나지. 형태는 변하지만, 그 안에 담겼던 추억과 사랑은 사라지지 않아. 그것들은 너의 마음속에, 그리고 대지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거야.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다시 차올랐지만, 이번에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이해와 위로, 그리고 삶의 순리에 대한 경외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살구나무는 사라질지라도, 그 나무가 지은에게 주었던 추억과 사랑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지은의 일부가 되어, 그녀의 삶의 뿌리가 되어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하늘은 다시 지은의 곁으로 돌아와 그녀의 손등에 제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는 맑은 소리를 내며 골골거렸다. 그 소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위로하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지은은 창밖을 내다봤다. 빗줄기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창문 너머의 세상은 더 이상 잿빛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를 맞은 나뭇잎들이 더욱 싱그러운 초록빛을 띠고, 젖은 흙에서는 생명의 강인한 냄새가 올라오는 듯했다.
어쩌면, 살구나무의 사라짐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것을 떠나보내고, 그 자리에 새롭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피어날 여지를 만드는 것. 지은은 하늘을 꼭 끌어안았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그녀의 마음을 단단하게 채워주었다.
“고마워, 하늘아.”
지은의 귓가에 녀석의 골골송이 계속해서 울렸다. 비는 그쳤고,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창가를 비추는 그 햇살 아래서, 하늘의 금빛 눈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지은은 이제 알고 있었다. 상실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작은 위로가 있다는 것을. 하늘은 그렇게, 지은의 삶에 또 하나의 깊은 깨달음을 선물했다. 그리고 지은은 그 깨달음과 함께, 젖은 세상 속에서 다시 걸어 나갈 작은 용기를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