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374화
고요한 밤하늘, 수억 개의 별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희미하게, 때로는 찬란하게 빛을 흩뿌리는 시간.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치지만, 그 속에는 왠지 모를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스튜디오의 붉은 ON-AIR 램프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마이크 앞에 앉은 DJ 한별의 눈빛은 밤하늘처럼 깊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여러분의 한별입니다.”
잔잔한 오프닝 음악이 잦아들자, 한별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수많은 이들의 방으로, 차 안으로, 혹은 고독한 밤의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따뜻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를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별이 많습니다. 마치 온 세상의 희망과 좌절, 사랑과 이별의 순간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을 내는 것만 같아요. 우리 모두는 저 별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지만, 때로는 그 빛이 너무 작아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죠. 그럴 때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싶어집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빛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첫 번째 사연 만나보겠습니다.”
한별은 천천히 한 통의 편지를 들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듯한, 정성스럽게 눌러 쓴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 속에서
“안녕하세요, 한별 DJ님. 저는 서울의 작은 골목길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서윤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좋은 구름’이라는 뜻인데, 제 삶은 마치 먹구름만 가득한 하늘 같아요. 한때는 제가 그리는 그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찬란한 색채로 가득한 제 캔버스는 저의 전부였죠. 하지만 몇 년 전, 제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전시회가 비평가들에게 혹독하게 평가받은 후로, 저는 붓을 들 용기를 잃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제 안의 색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캔버스 앞에 앉으면 막막한 흰색만 보입니다. 제가 무엇을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것이 흐릿하고, 제가 살아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요. 제게 다시 빛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그림이, 그리고 제가 다시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부디 제게 작은 희망의 빛이라도 비춰 주세요.”
편지를 다 읽은 한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스튜디오는 잠시 정적에 잠겼고, 오직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잔잔한 숨소리만이 그 공간을 채웠다.
“서윤님. ‘좋은 구름’이라는 이름이 먹구름 같다고 하셨지만, 먹구름도 언젠가는 비를 내려 메마른 땅을 적시고, 그 비가 그친 뒤에는 더욱 선명한 무지개가 피어납니다. 어둠 속에 있다고 해서 빛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다만 잠시 숨어 있을 뿐이죠. 창작의 고통은 때로는 깊은 어둠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빛을 찾아 헤매었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삶의 한 조각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죠.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빈 공간이었다는 것을요.”
한별의 위로 섞인 목소리는 서윤의 작업실 벽에 걸린 텅 빈 캔버스 사이를 메우는 듯했다. 서윤은 멍하니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촉촉한 기운이 맴돌았다. 모든 색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에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작은 빛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한별이 다른 사연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풍경
“이번 사연은 멀리 북쪽 지방에서 보내주신 준우님의 이야기입니다.”
“한별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준우입니다. 제 고향은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이었어요. 그곳에는 마을 어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렀죠. 개울가에는 늘 조약돌들이 반짝였는데, 특히 밤하늘의 별빛을 담은 듯한 오묘한 푸른색 조약돌을 저는 가장 좋아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푸른 조약돌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제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죠.
하지만 열여덟 살 되던 해, 가족들이 모두 도시로 이사 오면서 저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향의 풍경도, 조약돌의 빛깔도, 심지어 제가 그렸던 그림들의 모습조차 희미해져 버렸어요. 요즘 들어 저는 문득 그때 그 푸른 조약돌들이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잃어버린 기억 속의 풍경을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 조약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잊었던 제 안의 어떤 조각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제가 그렸던 그림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그 그림들이 제게 길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준우의 사연을 다 읽은 한별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두 사연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끈을 느꼈다.
“서윤님은 잃어버린 색깔을 찾고 계시고, 준우님은 잃어버린 풍경과 그 속에 담긴 푸른 빛을 찾고 계십니다. 참 신기하게도, 여러분의 사연은 이렇게 서로 이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어디엔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잃었을 뿐이죠. 어쩌면 서윤님의 그림은 준우님이 찾고 있는 그 ‘풍경’의 단서가 될 수도 있고, 준우님이 간직했던 ‘푸른 조약돌’의 기억이 서윤님에게 새로운 색채를 찾아줄 수도 있습니다.”
한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스튜디오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별빛들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우리가 아무리 어둠 속에 있다 해도, 밤하늘의 별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별빛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에게 닿으려고 노력하죠.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가려져 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에게 작은 별빛이 되어준다면, 우리는 분명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순간, 서윤은 잊고 있던 하나의 기억 조각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 강원도 시골 외가댁에 놀러 갔을 때, 개울가에서 만났던 또래 남자아이. 그 아이가 푸른 조약돌을 모아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기억. 그 아이가 자신에게 작은 조약돌 그림 하나를 선물했던 희미한 잔상. 서윤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 속에서, 무심코 스케치했던 푸른빛 조약돌의 형태를 찾아내려 애썼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각의 파편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섬광처럼 터졌다. 준우가 말한 그 풍경, 그 조약돌들이 자신의 그림 속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한편, 준우는 자신의 고향 마을 어귀에 있던 느티나무와 개울가를 그리워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언제나 푸른빛 조약돌들이 가득했지만, 어린 시절 선물했던 그림의 행방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 그림이 누군가에게 전해져 아직도 남아있을까? 그 그림을 통해 잊어버린 어린 시절의 감성이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그는 알 수 없는 설렘과 함께 한 가닥 희망을 붙잡았다.
한별은 마지막 곡을 소개했다. 잔잔하지만 힘 있는 멜로디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서로를 비추는 별”이라는 제목의 곡이었다.
“우리의 삶은 마치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같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각자의 빛을 내며 존재하지만, 때로는 서로의 빛을 받아 더욱 찬란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오늘 밤, 누군가의 별빛이 되고, 누군가의 빛을 받아 다시 힘을 얻는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저는 한별이었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음악이 흐르고, ON-AIR 램프가 꺼졌다. 한별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고요한 스튜디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묵묵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 아래에서, 두 개의 작은 빛이 서로를 향해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