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병원 복도의 공기가 수아의 뺨을 스쳤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겨울 햇살이 비쳤지만, 그 온기는 유리창 너머의 세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수아는 낡은 가죽 지갑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작은 사진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지훈과 자신이 활짝 웃고 있었다. 둘의 뒤편으로는 하얗게 쌓인 눈밭 위로 마지막 눈꽃들이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날, 차가운 손을 맞잡고 영원을 약속했던 날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말 괜찮겠어요, 수아 씨?”
희미한 기침 소리와 함께 지훈의 어머니, 은숙 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병실 안은 소독약 냄새와 그녀의 힘겨운 숨소리로 가득했다. 여사의 창백한 얼굴 위에는 깊은 주름들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는 불꽃처럼 강렬했다. 수아는 사진을 다시 지갑 속에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어머님. 제가 이런 일로 흔들릴 리 없잖아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수아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며칠 전, 정원 씨가 내민 손길은 지훈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회사를 살릴 유일한 동아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손길은 수아의 전부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훈을 향한 약속, 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맹세를 버려야만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지훈이가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
은숙 여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지훈이 해외로 떠난 지 벌써 5년. 연락이 끊긴 지는 3년째였다. 전쟁 같은 사업 실패와 어머니의 병환, 그리고 지훈의 실종. 모든 것이 수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수아는 지훈이 없는 동안,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키며 그의 어머니를 돌보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이제 그 모든 노력이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어머님, 이제 그런 생각 마세요. 지훈 씨는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요.”
수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녀는 매일 밤, 지훈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아니면 정말로 그녀를 잊었을까. 하지만 그 어떤 상상도 이 어머니 앞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지훈은 아직 살아있는 아들이자, 돌아올 아들이었다.
은숙 여사는 한숨을 쉬며 수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수아 씨. 이젠… 당신이 당신의 삶을 살아요. 지훈이가 언젠가 돌아온다 해도,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그 아이와의 약속도 좋지만, 이제는 당신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렴.”
그 말에 수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머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정원 씨의 제안과 그녀의 딜레마를. 자신이 지훈의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사라진 지훈을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려 하는지.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여사의 말 한마디가 오히려 수아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후벼 팠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지훈 씨가 돌아왔을 때… 제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 약속은… 우리의 전부였어요.”
수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애써 참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지훈과의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메마른 땅에 피어난 눈꽃처럼, 시린 계절 속에서도 굳건히 피어난 희망의 상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병실 문이 작게 노크도 없이 열리며 낯선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어딘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단정한 차림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수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병실을 착각한 것 같습니다.”
남자는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은숙 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순간 피가 돌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여사가 남자를 불렀다.
“어… 어서오빠…?”
남자는 문을 잡았던 손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파동이 수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서오빠’라는 말에 수아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은숙 여사의 잃어버린 동생, 지훈의 외삼촌. 20년 전 갑자기 사라진 뒤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았던 그 사람이었다. 그가 여기에 왜?
남자는 천천히 문을 다시 열고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은숙 여사와 수아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멈칫하며 수아의 손에 들려 있던, 방금 막 지갑에 넣으려 했던 사진으로 향했다. 순간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빛바랜 사진 속 지훈과 수아의 모습, 그리고 그 뒤편의 눈꽃 풍경을 본 그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형님… 제가… 제가 여기 있을 줄은….”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은숙 여사는 간신히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믿기지 않는 재회였다. 하지만 그 기적 같은 만남의 순간에도, 수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이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지훈의 사라진 행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20년 만에 나타난 그가, 과연 이 모든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걸까.
수아는 그 남자, 지훈의 외삼촌을 향해 불안하고도 희미한 희망이 섞인 눈빛으로 응시했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흩날리던 약속의 눈꽃은, 이제 또 다른 폭풍을 예고하는 전조처럼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