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지개, 새로운 시작
새벽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봉수골 이장님의 아침은 언제나 같았다. 낡았지만 윤기가 흐르는 마루를 뽀득뽀득 닦아내고, 뒷산에서 흘러내려온 맑은 약수를 한 잔 들이켜면, 비로소 이장님, 김봉수 씨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118번째 이야기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 봉수골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모든 순간에 이장님의 넉넉한 웃음과 든든한 어깨가 함께였다.
“으음, 오늘 아침 공기는 꽤나 시원하구먼.”
창문을 활짝 열자, 싸늘하면서도 상쾌한 늦가을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마당 귀퉁이에 심어놓은 감나무에는 주렁주렁 홍시가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 쪼르륵 앉아 아침 인사를 나누는 참새들의 재잘거림이 정겨웠다. 문득 어제 저녁 김점순 할머니가 읍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차편이 마땅치 않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장님은 서둘러 마루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메운 빈자리
“할머니, 아침 드셨어요? 오늘은 이 이장이가 모셔다 드릴게요. 걱정 말고 현관 앞에 나와 계세요.”
김점순 할머니는 이장님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깜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아이고, 우리 이장님 아니면 누가 이런 걸 챙겨준다고. 고맙구먼, 고마워!”라며 수화기 너머로 웃음꽃을 피웠다. 할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향하는 길, 이장님은 조수석에 앉은 할머니의 얼굴에 드리운 걱정의 그림자를 보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홀로 계신 어르신들의 무료함과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는 법이었다.
“할머니, 병원 진료 끝나고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장이라도 보고 가실래요? 요즘 마실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 읍내가 제법 북적거릴 겁니다.”
이장님의 말에 할머니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아이고, 그럼 좋지! 이장님 덕분에 오랜만에 사람 구경도 하고, 파전이라도 한 조각 먹고 와야겠구먼.” 이장님은 백미러로 할머니의 미소를 확인하며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작은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큰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이장님은 오랜 세월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고민과 화합의 한마당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마을회관으로 돌아오자, 벌써 몇몇 어르신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봉수골 어울림 한마당’ 행사 논의를 위해서였다. 올해는 작년보다 예산이 줄어들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특히 올해 새로 전입 온 젊은 부부들은 새로운 시도를 원했고, 고집 센 박 씨 영감님은 전통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다들 잠시만 귀 기울여 주시오.”
이장님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회의실 한가운데 섰다. “젊은 친구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도 좋고, 어르신들의 깊이 있는 전통도 중요하지. 둘 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소? 낮에는 어르신들이 준비한 전통 놀이 마당과 장터로 꾸미고, 저녁에는 젊은 친구들이 제안한 작은 음악회를 여는 건 어떤가? 음식은 각자 집에서 조금씩 가져와 나눠 먹으면 예산도 절약하고, 더 풍성한 잔치가 될 것 같구먼.”
이장님의 제안에 회의실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박 씨 영감님이 헛기침을 하더니 “흠, 뭐… 나쁘지 않구먼. 젊은이들이 흥겹게 노는 것도 나쁘진 않지.”라고 중얼거렸다. 젊은 부부들도 이장님의 지혜로운 중재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장님이 118화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어느 오후의 소란, 그리고 평화
점심 식사 후, 이장님은 평소처럼 마을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을 어귀에서 새롭게 농사를 짓기 시작한 윤 씨 부부가 급히 이장님을 찾아왔다. 밭 경계 문제로 옆집 이 씨 할아버지와 실랑이가 붙었다는 것이었다. 이 씨 할아버지는 평생을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온 터라 한 치의 양보도 없으려 했다.
“이장님, 저희가 괜한 오해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측량 결과에 따라…” 윤 씨 부부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젊은 사람들이 뭘 안다고! 내 평생 저기까지가 우리 밭이었어!” 이 씨 할아버지도 노발대발했다.
이장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다. 이내 측량 도면을 확인하고는 두 사람을 불렀다. “이 씨 할아버지, 젊은 부부가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윤 씨 부부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보는 건 어떻겠소? 여기 도면을 보면, 분명 윤 씨 부부의 말이 맞지만, 할아버지께서 경계로 삼았던 돌멩이 하나가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마을의 역사를 지켜봤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이장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 씨 할아버지, 그 경계석이 할아버지의 오랜 벗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젊은 부부와 새로운 봉수골을 만들어갈 때이니, 그 돌멩이를 기념으로 마을 입구의 작은 표석으로 옮겨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그 대신, 윤 씨 부부가 할아버지 밭의 가을걷이를 돕고, 앞으로 농사에 필요한 품앗이를 약속하면 어떨까요?”
이장님의 현명한 제안에 이 씨 할아버지의 굳었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윤 씨 부부도 기꺼이 동의했다. 마을 어귀에는 잠시 전의 소란은 사라지고, 가을 햇살 아래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이장님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분쟁 해결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다시 엮어주는 일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루의 끝, 그리고 이어질 이야기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이장님은 비로소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만은 가을 하늘처럼 맑고 풍요로웠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온몸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식탁 위에는 아내가 정성껏 차려놓은 따뜻한 저녁상이 놓여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마을에 또 무슨 일 있었어요?”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떠주며 물었다.
“허허, 별일은. 그저 우리 동네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하루였지. 작은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따뜻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으니, 그것으로 됐지 뭔가.”
이장님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마을의 이야기들, 그 중심에서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보듬어온 그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118번째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봉수골을 찾아올까. 이장님은 창밖의 별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유쾌한 하루는, 그렇게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