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02화

어둠 속, 한 줄기 빛

지영은 손끝으로 낡은 일기장의 해진 모서리를 매만졌다. 백 두 번째 장을 넘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페이지마다 배어있는 할머니의 희미한 체취와 잉크 냄새가 마음을 짓눌렀다. 지난 몇 주간, 이 낡은 일기장은 지영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가장 잔혹한 진실의 거울이었다. 할머니는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도 같은 시간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지영은 그 바다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심장이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어젯밤 꿈에 할머니가 나왔다.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서도 그 슬픔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오늘 읽게 될 이야기가 어떤 비극의 절정일 것이라는 예고처럼.

창밖은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낙엽들이 뒹구는 소리가 마치 속삭이는 한숨처럼 들렸다. 지영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펼쳤다. 먹물로 눌러 쓴 날짜는 1968년 11월 7일. 할머니의 나이 스물셋. 지영의 어머니가 태어나기 5년 전이었다.

1968년 11월 7일, 비.

밤새 비가 내렸다. 마치 내 마음속 슬픔이 온 세상을 적시는 것만 같았다.
며칠째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 아이의 작은 얼굴이 아른거려. 손가락 하나하나가 얼마나 작고 여렸던가. 내 젖을 물고 새근거리는 숨소리, 작은 입술로 내 손가락을 오물거리던 그 촉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나는 아이를 보냈다.
어머니의 눈물, 아버지의 매서운 질책, 그리고 가문의 명예라는 족쇄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아이를 지켜낼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작은 보자기 속에 싸인 아이를 품에 안고 온몸으로 흐느낄 뿐이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려는 마차 앞에서,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어머니… 제발… 제발….”
나의 애원에도 마차는 덜컹거리며 멀어져 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 찢어진 심장이 내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맡아줄 노부부는 좋은 분들이라 했다. 자식 없이 사는 이들이니 내 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펴줄 거라고. 그 말들이 나를 위로할 수 있을까. 내 살을 찢어내는 듯한 이 고통을 잠재울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내 아이를 버렸다. 세상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질까 두려워, 가장 소중한 것을 내 손으로 놓아버렸다.
빗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젖어드는 차가움만이 나를 집어삼킬 뿐이었다.
내 아기, 내 소중한 아기… 부디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자라다오.
어미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이 가슴 한편에 너를 품고 살아갈 것이다.
이 죄를 어찌 씻을 수 있을까. 이 고통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숨겨진 그림자

지영의 손에서 일기장이 떨어져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슴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일기장의 글씨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숨겨진 아이… 지영은 이토록 아프고 절절한 이야기가 자신들의 가족사 한편에 깊이 묻혀있었다는 사실에 충격과 동시에 거대한 슬픔을 느꼈다.

할머니는 평생을 가슴 한편에 묻어둔 채 살아오셨을 것이다. 어쩐지 할머니의 눈빛에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린 시절, 유난히 자신을 애틋하게 안아주시던 할머니의 품, 한밤중에 조용히 부르던 자장가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그 자장가는 지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그 아이’를 위한 회한의 노래였을 것이다.

지영은 흐느끼며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며칠 전,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가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애틋함과 동시에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사진의 뒷면에는 흐릿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 사랑, 별.’

‘별.’ 지영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했고, 그렇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영은 문득, 며칠 전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쳤던 노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장에서 과일을 팔던 노부인. 할머니와 너무나도 닮은 눈매와 입매를 가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던 그 노부인. 그녀의 작은 손목에는 오래된 은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그 팔찌에는 희미하게 ‘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연결고리가 지영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할머니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겨진 진실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영은 자신이 이 모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쥐고 있음을 직감했다.

창밖의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지영은 눈물로 젖은 시야 속에서 일기장과 사진,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평생 짊어졌던 슬픔의 무게가 이제 고스란히 지영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듯했다. 과연 이 숨겨진 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흩어진 가족의 조각들을 다시 맞출 수 있을까?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지영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심장이 새로운 용기와 함께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