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동네 이장님의 하루 – 제120화

김철수 이장님의 하루는 늘 그랬듯 새벽 공기를 가르는 닭들의 힘찬 울음소리로 시작되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솟아오르기 전, 옅은 안개가 산자락을 감싸고 있는 시간. 철수 이장님은 이 오래된 동네의 아침 냄새를 가장 사랑했다. 갓 지은 밥 냄새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그리고 새벽녘 텃밭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한데 어우러진, 정겹고 익숙한 향기였다.


그는 아침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를 돌며 하루를 시작하는 주민들과 눈인사를 나누곤 했다. 논으로 향하는 트럭에 손을 흔들어주고, 새벽 일찍 문을 연 구멍가게 할머니께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소소한 안부를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늘 너털웃음이 걸려 있었고, 그 웃음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마치 해 뜰 무렵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꽃 없는 마당, 스러진 웃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이유를 철수 이장님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박순자 할머니 댁 앞을 지날 때였다. 예전에는 사시사철 온갖 꽃들로 북적였던 할머니의 마당이 이제는 텅 비어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할머니의 마당에서는 더 이상 생기 넘치는 꽃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의 웃음소리도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동네를 지나던 젊은 새댁 미경 씨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 미경 씨. 새벽부터 장 보러 가나? 부지런도 하여라.” 철수 이장님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답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굳게 닫힌 박 할머니 댁 대문에 머물러 있었다.

미경 씨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박 할머니 걱정이 많으시죠? 통 기력이 없으신 것 같아요. 아침마다 보던 할머니 모습이 이제는 보이지 않으니…” 그녀의 목소리에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철수 이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 걱정이지. 저 마당이 저리 황량한 걸 보니 내 마음도 영 편치 않아. 박 할머니는 저 꽃들 가꾸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오래된 기억, 작은 씨앗

마을회관에 도착한 철수 이장님은 서류 더미에 파묻히기 전,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을 쥐고 그는 박 할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마을의 소문난 원예가였다. 작은 씨앗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 같은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철수 이장님의 막내딸이 어릴 적, 시름시름 앓을 때도 박 할머니가 직접 키운 꽃을 가져다주며 “이 꽃처럼 예쁘게 다시 필 거여”라고 위로해주셨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 꽃이 시들지 않도록 매일 정성껏 물을 주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무언가 해야 해.” 철수 이장님은 중얼거렸다. 박 할머니의 마당에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되찾는 것을 넘어, 할머니의 마음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될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억지로 꽃을 가져다 심어봐야 할머니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기발한 계획: 마을 꽃길 프로젝트

한참을 고민하던 철수 이장님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을회관 게시판으로 향했다. 큼지막한 종이에 붓펜으로 큼지막하게 휘갈겨 썼다.

[긴급공고] 아름다운 우리 마을 꽃길 조성 프로젝트!


내용은 이러했다. 다가오는 봄을 맞아 마을 전체에 아름다운 꽃길을 조성하자는 것. 각 집 마당과 골목길에 꽃을 심어 마을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을의 어르신들과 함께”라는 문구였다. 젊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의 지혜를 빌려 꽃을 심고 가꾸는 프로젝트였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은 박 할머니의 마당을 다시 꽃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마을 전체의 일로 포장하여 할머니가 부담 없이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이장님은 박 할머니가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원예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할머니의 마음도 조금씩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오후가 되자, 마을회관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장님의 프로젝트 공고를 보고 모여든 주민들이었다.

“이장님,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 집 마당에도 뭘 좀 심고 싶었는데, 영 자신이 없어서요.” 젊은 엄마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도요! 박 할머니께서 워낙 손재주가 좋으시니, 할머니께 좀 여쭤보면 좋겠네요.”

철수 이장님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그럼! 다들 박 할머니께 많이 배우도록 해. 이장님이 특별히 부탁해서 할머니를 ‘총감독’으로 모실 참이니까!”

모두의 시선이 박 할머니 댁을 향했다. 몇몇 젊은이들은 벌써부터 기대에 찬 얼굴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다시 피어나는 희망

다음 날 아침, 철수 이장님은 일부러 가장 늦게 박 할머니 댁을 찾았다. 이미 마당에는 젊은 사람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한가운데,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 박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흙을 손에 쥐고, 씨앗을 설명하며, 모종을 심는 방법에 대해 조곤조곤 일러주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 잠자고 있던 보물을 꺼내든 사람처럼, 할머니는 자신이 가진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었다.

“얘들아, 여기는 햇볕이 잘 드니 채송화가 좋고, 저쪽은 그늘이 지니까 봉선화를 심는 게 좋겠어.”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젊은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흙을 고르고, 작은 모종을 심고, 조심스럽게 물을 주었다. 텅 비어 황량했던 마당은 삽시간에 활기를 되찾았다. 젊은이들의 웃음소리와 할머니의 온화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철수 이장님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박 할머니의 마당이 꽃으로 채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할머니의 마음에 다시 웃음꽃이 피어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따뜻한 마무리

해 질 녘, 마을회관 앞 벤치에 앉은 철수 이장님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뜨끈한 믹스커피를 마셨다. 노을빛이 마을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박 할머니 댁 마당에서는 아직도 젊은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 할머니의 마당 사진을 찍었다. 텅 비어있던 곳에 새로 심어진 작은 모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직은 연약한 새싹들이지만, 머지않아 탐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라는 믿음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오늘 하루도 이장님의 소소하지만 따뜻한 지혜로 마을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유쾌한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또 한 번의 희망을 심으며 깊어지고 있었다. 동네는 그에게 삶의 전부였고, 주민들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이 마을을, 이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유쾌한 마음으로 곁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