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388화

지우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서늘한 방에서,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종이 가장자리는 세월의 흔적으로 바래고 너덜거렸지만, 할머니의 꼼꼼한 필체는 여전히 또렷했다. 오늘은 388번째 이야기에 다다랐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옅게 풍겨 나오는 오래된 종이 냄새는 마치 할머니의 온기처럼 지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할머니는 언제나 모든 것을 기록했다. 사소한 날씨 이야기부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희미한 슬픔까지, 그 일기장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한 세대의 증언과도 같았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마른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으며 읽기 시작했다.

1952년 1월 17일, 몹시 춥고 눈 내리는 날

“오늘 아침, 동현이가 꿈에 나타났다. 분명 살아 돌아올 리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면 가슴 한편이 시리고 또 시리다. 벌써 몇 년인가. 해마다 동짓달이 오면 형님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 불쌍한 어미는 그저 애타게 이름만 부르다 가슴을 칠 뿐이다. 전쟁이 무엇이길래, 한밤중에 싸리비처럼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동현이의 발걸음 소리 같아 몇 번이고 문을 열어젖히게 만드는가.

그때도 이런 눈이 내렸던가. 형님은 언제나 나를 업어주고, 등에 얼굴을 묻으면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왔지. 그날도 나는 장독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깡마른 손으로 언 손을 비비고 있었다. 형님은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얼어붙은 흙을 털어내며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 우리 막내 추워서 어째. 손 다 언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꺼내준 것이, 갓 구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였다. 작은 손으로 반을 쪼개 내게 건네주며 ‘다 먹고 나면 내가 예쁜 그림 그려줄게. 우리 막내는 크면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하고 웃어 보이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 고구마 한 조각을 움켜쥐고 뜨거워서 호호 불면서도 얼마나 행복했던가. 형님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낡은 종이에 숯이나 먹물로 우리 마을 풍경을 그리곤 했다. 늘 내게 약속했었다. 언젠가 좋은 물감을 사서 내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그때가 오면 나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제일 예쁜 미소를 지어야지, 하고 꿈꿨었다. 그 그림은 끝내 그려지지 않았지.

그 약속은, 그 그림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 되어버렸다. 동현아. 너는 어디에서, 어떤 하늘을 보고 있느냐. 이 못난 누이는 아직도 너를 기다린다. 너의 빈자리만큼 시린 바람이 분다.”

지우는 글의 마지막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할머니의 필체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더욱 격정적이고 떨리는 듯했다. 지우의 눈가에도 어느새 맺힌 물방울이 뚝 떨어져 옅은 잉크 자국 위에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오빠, 즉 지우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분. 동현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가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아픈 역사였다. 전쟁 통에 소식도 없이 사라진 젊은 오빠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던 할머니의 삶.

지우는 그제야 할머니가 왜 항상 겨울이 되면 유독 쓸쓸해 보였는지, 왜 새빨간 동백꽃을 보면 그토록 오래도록 바라보셨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일기장에 담긴 글자 하나하나에 할머니의 한과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었다.

그날 밤, 지우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정리했던 낡은 상자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할머니의 유품 중에는 동현 증조할아버지와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을 테니까.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장은 달랐다. 생생한 기억을 통해 할머니는 동현 증조할아버지를 지우에게 다시 데려다주었다. 고통스러웠을 할머니의 회한을 이제야 지우는 온몸으로 느끼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지우는 망설임 없이 다락방으로 향했다. 먼지가 잔뜩 쌓인 나무 상자들 사이에서 할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낡은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보자기 안에는 닳고 닳은 놋수저 한 벌과 빛바랜 사진첩이 들어있었다. 사진첩을 펼치자, 흑백 사진 속에서 앳된 얼굴의 할머니와 늠름한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분명 동현 증조할아버지일 터였다. 왠지 모르게 할머니의 일기 속 그 웃는 얼굴이 사진 속에서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사진첩 맨 마지막 장.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낡은 사진 한 장이 조심스럽게 끼워져 있었다. 그 사진은 다른 사진들과는 다르게 색이 바래지 않은, 마치 최근에 찍은 듯 선명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니, 그림이었다. 먹물로 그려진, 어린 소녀의 옆모습. 곱게 땋은 머리와 살짝 올린 입꼬리가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할머니였다. 그림 한쪽 귀퉁이에는 ‘내 막내 동생’이라는 글씨가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지우의 손이 그림을 스치자, 얇은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이것은… 할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동현 증조할아버지가 약속했던 그 그림이 아닐까? 하지만 언제, 어떻게…?

그 순간, 지우의 눈은 사진첩 뒷면에 조용히 붙어 있는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바싹 마른 꽃잎 하나가 함께 붙어 있는, 누군가의 낯선 필체로 적힌 글귀였다.

“귀댁의 오라버님께서 생전에 그렸던 그림입니다. 부디 이 그림과 함께 슬픔을 잊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까지도, 오직 동생의 안녕만을 염원하셨습니다.”

지우의 눈앞이 흐려졌다. 할머니는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끼셨을까. 평생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그림이, 오빠의 마지막 유품이 되어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과연 어떤 눈물을 흘리셨을까. 약속이 지켜지지 못했다는 슬픔보다, 끝내 자신을 기억하고 그림을 남긴 오빠의 사랑에 더 가슴 저렸을 것이다. 지우는 그림을 든 채, 차가운 다락방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의 일기장 속 슬픔과 그림 속 오빠의 사랑이, 시대를 넘어 지우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이제 지우는 할머니가 평생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그림 속에 담긴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그림이,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의 또 다른,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페이지임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