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22화

그날 저녁, 하늘은 납빛 구름으로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봄을 재촉하는 듯한 늦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흐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시린 물속에 잠긴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최근 몇 주간, 삶의 흐름이 어디서부터 뒤엉킨 실타래처럼 느껴졌다. 풀고 또 풀어도 끝없이 매듭이 이어지는 기분.

그때였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차 향기 사이로,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온기가 다가왔다. 발치에 부드러운 털 뭉치가 닿는 느낌. 고개를 숙이자, 길고양이 ‘별’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크고 맑은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는 듯한 깊이가 있었다. 별은 내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와, 마치 그곳이 제 자리인 양 둥글게 몸을 말고 앉았다. 작게 울리는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빗소리 속에서 잔잔한 위로처럼 퍼졌다.

“별아,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서 좋겠다.”

나도 모르게 푸념처럼 뱉은 말이었다. 별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방금 한 말의 깊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녀석이 고개를 내 손등에 살포시 비볐다. 그 섬세한 움직임이 내 안에 굳어있던 무언가를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별은 언제나 그랬다. 말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존재.

“세상은 늘 이렇게 복잡하기만 할까?” 내가 묻자, 별은 아주 나직한 소리로 “미야옹” 하고 답했다.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복잡함은 네가 만든 실타래일 뿐, 세상은 그저 흐를 뿐이란다.”

나는 피식 웃었다. 별에게서 답을 구하려는 내가 우스웠지만, 동시에 그 짧은 울음소리에서 오는 알 수 없는 평화로움에 안도했다. 별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길 위에서 온갖 풍파를 겪었을 텐데도, 녀석의 눈빛에는 좌절이나 분노 대신, 삶을 그저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체념 아닌 통찰이 서려 있었다. 녀석은 햇살을 찾아 나른하게 몸을 뉘고, 빗물에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완전한 존재였다.

“너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거니? 때로는 화도 나지 않아? 서럽거나, 슬프거나… 그런 감정은 없어?”

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길게, 그러나 결코 날카롭지 않은 목소리로 울었다. “미야아아옹…” 그 소리는 마치 오랜 역사를 품은 고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나는 녀석의 눈빛에서 과거의 조각들을 보았다. 매서운 겨울밤, 굶주림에 허덕이던 순간들, 자신을 위협하던 다른 존재들과의 싸움, 그리고 홀로 남겨졌을 때의 깊은 외로움… 녀석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녀석은 내 무릎 위에서 그르릉거리며 따뜻함을 나누고 있었다.

“모든 감정은 흐르는 물과 같단다,” 별의 눈빛이 속삭이는 듯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그리고 평화도. 굳이 붙잡아두려 애쓸 필요가 없어. 그저 바라보고, 느끼고, 흘려보내면 돼. 네가 그것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너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진 않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나는 최근 내가 겪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끝없이 분석하고, 붙잡고, 더듬거리며 붙어 있으려 했다. 마치 그 감정들이 내 존재의 전부인 양. 하지만 별은, 그 모든 것이 그저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붙잡지 않아도,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 사라질 물결에 불과하다고.

“그럼… 놓아야 한다는 거니?”

별은 앞발을 들어 내 팔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 행동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리고 동시에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나를 꾸짖는 듯했다. 녀석의 눈빛은 비 오는 창밖을 향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새어 들어오려는 듯, 하늘의 색깔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놓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니야. 모든 흐름은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새로운 강을 만나지. 네가 지금 붙잡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 새로운 강물에 실려 너에게 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아름다운 형태로 변해 너의 발자국을 비출 수도 있단다.”

별의 말이, 아니 별의 눈빛과 행동이 내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놓아주는 것.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꽉 쥐고 놓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닐까. 불안과 걱정, 지나간 후회와 다가올 불확실성까지. 그것들이 나를 짓눌러 숨 막히게 했던 것은 아닐까.

빗줄기가 완전히 그쳤다. 창밖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차가웠던 공기 대신, 비에 씻긴 풀잎의 싱그러운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별은 내 무릎에서 조용히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밖을 응시했다. 녀석의 뒷모습은 작고 연약했지만, 그 어떤 거목보다도 굳건하고 지혜로워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별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밖 풍경은 달빛 아래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곧이어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검푸른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양이 ‘별’의 눈처럼, 깊고 빛나는 수많은 별들.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실타래가 스르륵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고, 차가웠던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별은 나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나직하게 울었다. “미야옹.” 그 울음은 이번에는 이렇게 들리는 듯했다. “봐라, 밤하늘은 언제나 새로운 별을 보여주지 않니?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뜰 것이고.”

나는 무릎을 굽혀 별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털 속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작은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소리가 내 심장과 공명했다. 때로는 가장 복잡한 문제의 해답이 가장 단순한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해답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이 작은 길고양이와의 ‘대화’라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길고 긴 밤, 고요한 창가에 기대어, 나는 별과 함께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많은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이제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