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403화

창밖으로는 희미한 노을이 졌다. 여름의 끈질겼던 생명력은 이제 푸석한 가을 잎사귀 몇 조각에 겨우 매달려 있는 듯했고,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의 차가운 숨결이 벌써부터 공기 중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뜨거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묘한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무릎 위에는 그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시간 내내 널브러져 자던 고양이는 해가 지기 시작하자 마법처럼 나의 존재를 감지하고 스르륵 다가와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느껴지고, 작게 부풀어 오르는 털뭉치 위로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차가웠던 손을 녹여주었다.

사라지는 것들과 남겨지는 것들

“벌써 겨울이 오려나 봐. 시간이 참 빠르지, 그 아이야.” 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양이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귀를 쫑긋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나의 말을 온전히 듣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라지는 것들이 더 크게 다가와. 푸르렀던 잎들이 색을 잃고, 따스했던 햇살이 힘을 잃고… 마치 내가 붙들고 싶었던 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아. 가끔은 그게 너무 서글퍼.”

내 목소리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묻어났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감정들이 자주 찾아왔다. 특별히 힘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흘러가는 것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고양이는 조용히 숨을 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온 우주의 고요와 지혜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의 걱정, 나의 고민, 나의 슬픔까지도 그 눈빛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따뜻한 침묵 속의 대답

그 아이는 천천히 몸을 틀어 내 손등에 제 머리를 톡, 부딪쳤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뺨을 비볐다. 간지러우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마음속을 휘젓던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멈추게 했다. 이윽고 고양이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야옹” 하고 울었다. 그 한 마디는 여느 때보다 길고, 깊고, 울림이 있었다. 마치 온 마음을 다해 전하는 메시지 같았다.

‘사라지는 것들에만 눈길을 주지 마세요, 인간.’ 고양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이 피어나고, 또 다른 형태로 남겨지는 것들이 있지요.’

나는 고양이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온기는 차가워진 내 마음에 스며들어 작은 불씨를 피워 올리는 듯했다.

‘저 낙엽들은 언젠가 땅으로 돌아가 새로운 씨앗을 품을 양분이 될 거예요. 차가워지는 공기 속에는 곧 내릴 새하얀 눈의 약속이 담겨 있고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 쌓이는 시간의 흔적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지혜와 추억으로 당신을 채워줄 겁니다.’

나는 고양이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붙잡으려 했던 것은 변화의 과정 자체였고,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들을 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고양이와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삶의 순환, 존재의 의미, 그리고 소소한 것들이 주는 기쁨. 이 작은 생명체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본질적인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곤 했다.

고양이는 다시 내 무릎에 몸을 웅크렸다. 이번에는 좀 더 바싹 붙어왔다. 그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나의 허전했던 마음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사라지는 것들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던, 남겨지고 새롭게 피어날 것들에 대한 희미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

나는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기댔다. 향긋하고 포근한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래, 그 아이야. 네 말이 맞아.” 내가 중얼거렸다. “사라지는 것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일 뿐이야. 겨울은 새로운 봄을 위한 휴식이고, 오늘 진 노을은 내일의 찬란한 해를 위한 잠시의 어둠일 뿐이지.”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목을 울렸다. 작게 골골거리는 소리가 온몸에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 소리는 단순한 고양이 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이치를 품고 있는 듯한, 따뜻하고 깊은 위로의 노래였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싸늘한 공기 속에서도 고양이의 온기가 나를 감쌌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대신, 다가올 겨울과 그 너머의 시간을 고양이와 함께 맞이할 준비가 된 듯한 기분 좋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우리 둘만의 고요한 대화는 오늘 밤도 그렇게 깊이를 더해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진다 해도, 이 작고 따뜻한 온기만은 영원히 나의 곁에 남아 빛을 비춰줄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