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시골 마을의 비밀 – 제406화

새벽녘 안개는 여전히 마을을 품에 안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나직이 흐르는 개울물 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렸다. 수현은 이른 아침부터 텃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흙냄새와 풀 내음이 뒤섞인 상쾌한 공기가 가슴 가득 퍼졌다. 도시의 소란스러움에 지쳐 이곳, 따뜻한 이름을 가진 상록마을에 정착한 지 어언 5년. 수현은 이제 이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과 정겨운 인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마을을 감도는 미묘한 기류는 수현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박순영 할머니의 이상 행동은 수현의 걱정을 증폭시키는 주된 원인이었다. 순영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살아있는 역사였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덕담으로 마을 사람들을 보듬어주던 할머니였지만, 지난 몇 달간 할머니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텃밭에서 갓 캔 붉은 토마토를 바구니에 담아 순영 할머니 댁으로 향했을 때, 할머니는 마당 한켠의 오래된 감나무 아래에 멍하니 앉아 계셨다. 초여름의 따스한 햇살이 할머니의 희끗한 머리칼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할머니, 아침부터 이렇게 나와 계세요? 제가 방금 딴 싱싱한 토마토 가져왔어요.”

수현이 환한 미소로 다가가자, 할머니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의 눈동자에 잠시 수현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어… 수현이 왔는가. 내가 잠시 잊었네.”

할머니는 힘없이 웃으며 수현의 손에 들린 토마토 바구니를 바라봤다. “참 예쁘게도 생겼다. 붉디붉은 것이… 꼭 그때 그날 같구나.”

‘그때 그날’이라는 말에 수현의 심장이 철렁했다. 할머니는 종종 과거의 특정 시점을 지칭하는 듯한 모호한 표현을 썼다. 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바구니를 할머니의 무릎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때 그날이요? 할머니, 혹시 옛날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제가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수현은 할머니의 기억을 자극하면서도, 그것이 할머니에게 고통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순영 할머니는 토마토 하나를 집어 들고 손으로 둥글게 매만졌다. 할머니의 시선은 다시 먼 하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유독 붉었지. 달도, 별도… 심지어 저 우물 속 그림자마저도.”

할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마당 한구석,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절반쯤 가려진 낡은 돌우물이었다. 마을의 다른 우물들은 오래전에 다 메워지거나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이 우물만은 순영 할머니가 굳이 남겨두라고 고집해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는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우물은 이제 그저 오래된 흔적처럼 보였다.

“우물요? 할머니, 저 우물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예요?”

수현의 질문에 할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할머니의 눈은 순간 형형하게 빛나는 듯했으나, 이내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비밀이라니…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잊혀야 할 것들뿐이지.”

할머니는 바구니에서 토마토를 모두 꺼내 마루에 내려놓더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삐걱거리는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영문도 모른 채 텅 빈 마당에 홀로 남겨졌다. 할머니의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작고 왜소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위태롭고 쓸쓸해 보였다.

***

그날 오후, 수현은 마을회관에서 김영숙 할머니와 함께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영숙 할머니는 순영 할머니와 동갑내기 친구이자 마을의 또 다른 어른이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순영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영숙 할머니, 순영 할머니께서 요즘 자꾸 옛날 우물 이야기를 하세요. ‘그날 밤’이니, ‘우물 그림자’니… 혹시 할머니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요?”

영숙 할머니는 무를 썰던 손을 멈칫했다. 할머니의 시선이 수현에게 닿았다. 그 눈빛 속에는 체념과 함께 깊은 회한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순영이가… 또 그랬는가. 그 우물은… 그냥 오래된 우물일 뿐이야. 별다른 건 없어.”

영숙 할머니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수현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된 우물 이야기에 대해 묘하게 침묵했다. 질문을 하면 대충 얼버무리거나 화제를 돌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순영 할머니가 그걸 이야기할 때마다 너무 힘들어 보이세요. 마치… 뭔가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계신 것처럼요.”

수현의 진심 어린 걱정에 영숙 할머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는 창밖을 내다봤다. 오후의 햇살이 마을회관의 낡은 창문으로 길게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잊어야 할 것들이 있지. 살아가려면… 잊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 순영이는 그걸 잊지 못하는 것뿐이고.”

“뭘 잊지 못하신다는 건데요?”

수현이 다그치듯 묻자, 영숙 할머니는 다시 수현을 돌아봤다. 할머니의 눈빛은 짙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치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속삭였다.

“그날… 사라진 아이.”

수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사라진 아이라니? 영숙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칼질을 이어갈 뿐이었다. 수현은 할머니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마을에 그런 비극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수현은 순영 할머니의 낡은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마당 한켠의 오래된 우물로 이끌렸다. 잡초를 헤치고 우물가에 섰을 때, 수현은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덮개는 낡은 나무판자로 위태롭게 얹혀 있었고, 그 틈새로 보이는 우물 안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순영 할머니가 ‘그날 밤 붉었던 우물 그림자’라고 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라진 아이는 누구이며, 언제, 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왜 마을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우물가에 쪼그려 앉은 수현은 조심스럽게 덮개를 치웠다. 우물 속에서 훅, 하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숨결 같았다. 수현은 휴대폰 불빛을 켜 우물 안을 비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빛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닿은 우물벽 한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이 분명한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조각의 한쪽 면에는 작은 글씨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건져 올렸다. 흙과 이끼로 범벅된 나무 조각을 닦아내자, 빛바랜 글씨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정호야… 엄마가 미안해… 다시 돌아와 줘.’

수현의 손에서 나무 조각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정호’. 사라진 아이의 이름일까? 그리고 ‘엄마’라는 글씨는… 순영 할머니?

수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물 속 깊은 어둠을 응시했다. 차가운 바람이 수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상록마을의 비밀이 이제 막 그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비밀의 한가운데, 낡은 우물과 박순영 할머니, 그리고 ‘정호’라는 이름이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현은 이 모든 것의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진실이 너무나 거대하고 잔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