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오래된 저택의 뜰에는 달빛이 은가루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수백 년 된 은행나무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마치 거대한 팔을 벌려 무언가를 감싸 안으려는 듯 보였다. 은하는 그 그림자 아래, 차가운 돌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숲의 가장자리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사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과거의 어느 한 점에 박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심연처럼 깊었다.
차게 식은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계절은 이미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고, 곧 매서운 겨울이 닥쳐올 터였다. 은하의 마음속에도 이미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늘 밤, 그녀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들이 이 달빛 아래에서 그림자처럼 일렁이며 그녀를 괴롭혔다.
얼마 전 도착한 한 통의 편지.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은하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찢어버려야 마땅했지만, 그녀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 편지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과거의 아픔을 되살려냈다. 편지 속 문장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금 헤집어 놓는 듯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자정까지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지훈이 올 시간이었다. 십 년 만에 재회. 이토록 잔인한 만남이 또 있을까. 은하는 자신의 심장이 너무 격렬하게 뛰어 잠시 숨을 멈췄다.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여 그녀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왔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용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질책인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섬세한 춤을 추었다. 그 춤은 흡사 그녀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갈등과 같았다. 은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비어있는 폐를 차가운 밤공기로 가득 채웠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어리고 나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지난 십 년간 그녀는 스스로를 단련시켰고,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성벽을 마음속에 쌓아 올렸다.
저 멀리, 저택의 입구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의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의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코트를 입은 그는 달빛 아래에서 더욱더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은하는 그의 걸음걸이와 굳건한 어깨선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훈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단 한 번도 흐릿해진 적 없던 그 이름. 수많은 밤을 울부짖었고, 수많은 낮을 침묵했던 그 이름.
그가 다가올수록, 은하의 심장은 더 빠르게 박동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침내 지훈이 그녀의 바로 앞,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십 년의 세월이 그에게 새겨놓은 흔적들이 또렷했다. 날카로운 턱선과 깊어진 눈매는 그를 더욱 성숙하고 강인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은하.”
그의 목소리는 낮고 약간 쉬어 있었다. 십 년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 변함이 없었다. 단지 그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배어 있었다.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혀는 마비된 듯했고, 목구멍은 바싹 말라붙었다. 그저 눈동자만으로 그를 담아낼 뿐이었다.
지훈은 천천히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은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시선은 뜨겁고, 차가웠으며, 슬펐고, 동시에 분노로 일렁이는 듯했다.
“왜… 나타난 거야?” 은하의 목소리가 간신히 터져 나왔다. 그녀 자신도 놀랄 만큼 떨리는 목소리였다. 애써 감추려 했던 감정들이 일순간 드러나는 듯했다.
지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왜냐고? 내가 그 질문을 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십 년 동안…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는지.”
은하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질문은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변명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를 떠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난… 어쩔 수 없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사라진 후에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너의 흔적을 쫓아 세상 끝까지 헤맸어. 네가 죽었다는 소문에 절망했고, 네가 살아있다는 희망에 매달렸어. 내가…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망가졌는지 상상이나 해봤어?” 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렸던 분노와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그녀는 그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같은 지옥을 겪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날 밤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게 그녀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미안해…” 그녀는 겨우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무나도 무력하고, 너무나도 공허한 사과였다.
지훈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로 지난 십 년의 세월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달빛은 여전히 잔인할 정도로 환하게 뜰을 비추고 있었고, 그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위태롭게 춤추고 있었다.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더 이상 나약하게 울 수만은 없었다.
“나는 너를 배신한 적 없어, 지훈. 나는 그저… 너를 지키려 했을 뿐이야.”
그녀의 고백에 지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의 눈빛에 의심과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지켜? 네가 사라지는 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고?”
은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였다. 지난 십 년간 그녀의 영혼을 옥죄었던 그 비밀을. 달빛 아래에서 그림자처럼 숨겨왔던 진실을.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여전히 떨림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래, 지훈. 그때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어. 네가 알면 안 되는 일이 있었고… 내가 그 일을 감당해야만 했으니까.”
지훈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깊은 상처와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은하가 말하는 ‘진실’의 파편을 찾아 헤매는 빛이 보였다. 달빛 아래 춤추는 그림자처럼, 그들의 관계는 다시금 거대한 미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은하의 비밀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