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지혜의 뺨을 스쳤다. 온기가 사라진 방 안에서, 지혜는 오래된 나무 탁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며칠 전 엄마, 미숙과의 통화가 귓가에 맴돌았다. 격한 언쟁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긁어놓은 날카로운 침묵과 이해할 수 없다는 깊은 한숨이 더 큰 상처로 남았다.
지혜는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을 내려다봤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아주 어렸을 적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세월의 빛바램 속에서도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 옆의 엄마는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굳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지금의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아파하는 걸까.’ 지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탁자 한켠에 놓인 두꺼운 낡은 일기장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필체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 일기장은 지혜에게는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었다. 때로는 따뜻한 위로였고, 때로는 길을 밝혀주는 등대였으며, 때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였다. 덮어두었던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손때 묻은 종이 위로 할머니의 익숙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1978년 늦가을, 흐린 날
“오늘도 미숙이와 말다툼을 했다. 조심스레 건넨 나의 충고는 비수가 되어 돌아왔고, 아이의 눈빛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늘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미숙이가 나를 점점 더 멀리하는 것일까.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고 마당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이 상처를 어떻게 다독여야 할까.”
지혜는 숨을 죽였다. 할머니의 글씨에서 서글픈 감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할머니도 엄마랑 저런 때가 있었구나.’ 어쩌면 자신의 엄마인 미숙이 할머니에게 느꼈던 그 복잡한 감정들을, 이제 자신이 엄마에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1978년 겨울, 눈 오는 밤
“밤새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미숙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이 펄펄 끓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내 어리석은 고집 때문에 아이의 병을 더 키운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문득 어린 미숙이가 감기에 걸려 칭얼거릴 때, 내가 밤새도록 이마를 짚어주며 열을 내리려 애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뿐이었다. 지금은 왜 이렇게 복잡해진 것일까.”
할머니의 일기장은 계속되었다. 지혜는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할머니의 고뇌와 사랑을 함께 느꼈다. 할머니는 미숙의 병간호를 하며 지난날의 오해를 풀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미숙이 열에 들떠 흐느낄 때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했는지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1979년 초봄, 따뜻한 햇살
“미숙이가 많이 나았다. 창가에 앉아 고요히 햇살을 받는 아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차가웠던 아이의 눈빛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지난 겨울의 모든 설움과 분노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아이의 손을 잡았다. 미숙이는 놀란 듯 나를 바라봤지만, 이내 힘없이 잡힌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작은 온기가 이토록 소중할 줄이야.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결국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그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가르쳐준다.”
일기장을 덮는 지혜의 손이 떨렸다. 할머니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그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가르쳐준다.’ 할머니는 미숙과의 관계에서 아픔과 회복의 시간을 거쳐 결국 사랑을 찾아낸 것이다.
지혜는 사진 속의 엄마를 다시 바라봤다. 굳고 불안해 보이던 표정 속에도 어쩌면 할머니를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복잡한 사랑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차가운 말들 뒤에 감춰진 고통과 두려움이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엄마의 번호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다시 통화해도 또다시 상처만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장이 말해주듯,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엄마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지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연결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랬듯, 작은 온기 하나라도 서로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녀의 심장에서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희망의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차가운 밤이었지만, 지혜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밝아오는 새벽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길고 긴 가족의 역사가, 할머니의 지혜가 담긴 일기장과 함께, 비로소 새로운 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