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작은 공방에는 아직 겨울의 한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나무 냄새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이미 완연한 봄을 알리고 있었다. 마당의 매화나무는 마지막 꽃잎을 떨구며 연분홍빛 작별 인사를 고했고, 그 자리를 연초록 새싹들이 빼곡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김민준은 굽다 만 도자기를 매만지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흙의 차가운 감촉은 그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고독과 흡사했다.
새로운 계절의 문턱에서
오랜 세월 동안, 민준의 삶은 하나의 고요한 호수와 같았다. 잔잔하고, 깊으며, 때로는 먹먹한 그리움으로 일렁였다. 그의 시선이 작업대 한편에 놓인 낡은 사진으로 향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맑게 웃는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지혜. 그의 가슴속에 영원히 박제된 이름이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짧았던 봄날의 기억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빛이었고, 동시에 아물지 않는 상처이기도 했다.
그는 붓을 들었다. 흙으로 빚어진 항아리 위에 잊혀진 꿈들을 그려나가듯, 섬세한 붓질로 산등성이의 고요한 풍경을 담았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 파도에 흔들렸다. 그 어떤 붓질도, 그 어떤 흙의 향기도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이 그의 삶을 감싸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
“선생님! 계세요?”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공방 문이 열리고, 한유진이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들어섰다. 유진은 민준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으로, 젊은 활기와 따뜻한 마음씨로 민준의 고독한 삶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꾸러미와 함께 얇은 잡지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선생님, 오늘 날씨 정말 좋죠? 제가 읍내 나갔다가 선생님 생각나서 쑥떡이랑 식혜 좀 사 왔어요.”
유진은 상기된 얼굴로 탁자 위에 쑥떡과 식혜를 내려놓았다. 민준은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밝은 기운이 공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유진은 그의 곁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더니, 들고 있던 잡지를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거요. 제가 미술 잡지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건데…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봄바람이 전해준 이름
민준은 붓을 내려놓고 유진이 건넨 잡지를 받아 들었다. 표지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유진은 잡지를 넘겨 한 페이지를 펼쳤다. ‘신예 작가 이하은 개인전, <길 잃은 푸른빛>’이라는 제목 아래,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림들이 실려 있었다.
“색감이 정말 독특하죠? 특히 이 파란색은… 제가 예전에 선생님 작업실에서 본 선생님 그림이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유진의 말에 민준의 시선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림 속에는 짙푸른 바다와 그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 한 척이 그려져 있었다. 배 위에는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민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릿했고, 잊고 지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는 그림 속의 붓질과 색감에서 이지혜의 흔적을 보았다. 지혜가 즐겨 사용하던, 깊고 고요하면서도 애잔한 푸른색.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마음이 담긴 듯한 색채였다. 그의 눈이 작가 소개란으로 향했다. ‘이하은 (李夏恩)’…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쓰인 한 줄. ‘모친 이지혜(李智惠)’.
“모친… 이지혜…” 민준의 입술에서 힘없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유진은 민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되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그의 손에서 잡지가 미끄러져 탁자 위로 떨어졌다. 그림 속 푸른빛이 그의 눈앞에서 더욱 강렬하게 번졌다. 지혜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있었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바로…
민준의 머릿속에 혼란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혜와의 이별, 그녀의 갑작스러운 실종, 그리고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끝없이 이어지던 시간들. 그는 지혜가 세상을 떠났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잡지 속의 한 줄이 그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잡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림 속의 배는 파란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는 마치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듯했다.
오랜 침묵의 끝에서
“유진아…” 민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 아이는… 이하은 작가는… 혹시 태어난 해가….”
유진은 다시 잡지를 펼쳐 작가 프로필을 확인했다. “여기요… 19xx년생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 해는 민준과 지혜가 함께했던 마지막 해였다.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민준은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가슴속에서 억눌렸던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봄바람은 그의 공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그의 닫혔던 마음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그 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졌던 생명의 흔적, 끊어졌던 인연의 실타래, 그리고 다시 시작될 수도 있는 삶의 가능성이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따스한 봄 햇살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텅 비어 있던 그의 마음에 이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림의 제목은 아마도 ‘재회’ 혹은 ‘기다림’이 될 터였다. 그의 붓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한 산등성이를 그리지 않을 터였다. 거친 파도와 그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를, 그리고 그 배에 타고 있는 이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게 될 것이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너무 안 좋으세요…” 유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민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서려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새로운 봄날이었다. 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그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을 터였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지혜의 딸, 이하은… 그녀를 만날 용기가 과연 자신에게 있을까.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여,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