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416화

이안은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강물 속에서, 작은 조약돌처럼 자신을 굴러다니게 맡겼다. 수많은 시간을 떠돌며 겪은 폭풍과 격랑 속에서, 그는 이 작은 은신처에 잠시 정착했다. 시간의 틈새에 숨겨진 듯한, 과거와 미래가 기이하게 섞인 ‘정지된 마을’은 외부의 소용돌이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었다. 이곳에서 그는 잠시나마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잊힌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숨 쉬고 있었다.

마을의 낡은 시계탑이 째깍거리는 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시간 여행자에게 시간의 흐름은 종종 고통이었으나, 이곳의 시간은 마치 고장 난 태엽처럼 삐걱거리면서도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안은 낡은 선술집의 창가에 앉아,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빗물에 젖은 골목을 응시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 스며든 흙냄새와 풀잎 냄새가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 이안 씨.”

따뜻한 목소리가 그의 곁을 스쳤다. 세아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묶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그의 앞에 놓았다. 붉은색 꽃잎이 동동 떠 있는 차였다. 세아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맑고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별거 아니야, 세아. 그저… 비 오는 날은 늘 마음이 가라앉아서 말이야.”

이안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멀고 아득했다. 세아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안이 이 마을에 흘러들어 온 지 몇 달 만에, 그가 숨기고 있는 슬픔과 고독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괜찮아요. 여기선 비가 와도 모든 게 멈춰버리는 건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이안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지된 마을. 이곳에선 시간의 흐름이 느려질 뿐,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부 시간의 격변에서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일종의 보호막 안에 있는 곳이었다.

이안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닿는 은은한 단맛과 향긋한 꽃향기가 그의 마음을 잠시 평화롭게 했다. 그때였다. 그의 머릿속을 날카로운 파열음이 갈랐다.

잊힌 잔상

“크윽…!”

이안은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 그의 눈앞에 섬광처럼 펼쳐진 것은, 알 수 없는 푸른빛 에너지로 뒤덮인 거대한 장치였다. 기계의 웅장한 코어가 회전하며 굉음을 토해냈고, 그 주변에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한 여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 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낯익은 듯 낯선 문양이 새겨진 작은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충격파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순간, 이안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이안 씨! 괜찮으세요?”

세아의 놀란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본 것은 분명 기억의 파편이었다.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방금 겪은 일 같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일어난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니, 괜찮아…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이안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세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불안이 이안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잃어버린 기억은, 그가 겨우 찾은 작은 평화마저 언제든 위협할 수 있는 불안정한 폭탄과 같았다.

바로 그때, 낡은 선술집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빗물이 후두둑 안으로 들이쳤고, 낯선 그림자 하나가 문간에 섰다. 짙은 회색 망토를 두른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깊은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랭한 기운은 선술집 안의 모든 대화를 멈추게 했다.

“이곳에… 시간의 잔재가 숨어든 것을 알고 찾아왔다.”

낮고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후드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기계적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이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는군. 그러나 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시간의 방랑자, ‘코드명 델타’.”

이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코드명 델타. 잊혀진 이름. 그러나 그의 귓가에 맴도는 그 단어는 섬뜩할 정도로 익숙했다. 남자는 이안의 등 뒤에 서 있던 세아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 마을의 시간적 안정성을 해치고 있는 건, 바로 저 어린 여인의 존재다. 그녀는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될 변수야.”

세아는 그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아까의 고뇌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무슨 헛소리야. 세아는 이 마을 사람이야.”

“그렇지 않다. 그녀는 과거의 특정 시점에서 이탈하여, 이곳에 불시착한 존재다. 그녀가 여기에 머무는 한, 이 정지된 마을의 시간적 균형은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남자의 기계 눈이 차갑게 빛났다.

“돌아갈 곳이 없는 존재는… 소거해야 한다.”

선택의 기로

남자의 손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세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푸른 에너지 파동이 이안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산산조각 냈다. 선술집 안의 다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도망쳤다.

“널 여기에 보낸 게 누구지?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이안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는 ‘시간 관리국’의 집행자다. 너의 존재를 역추적하던 중, 이곳의 이상 징후를 감지했다. 너는 우리에게 중요한 데이터지만, 이 변수는 제거해야만 한다.”

남자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안은 민첩하게 움직이며 공격을 피했다. 그의 몸은 오랜 시간 여행을 통해 단련되어 있었지만, 기억의 공백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능력과 기술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이안 씨… 제가 문제라면… 제가 떠날게요.”

세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넌 아무 잘못 없어!”

집행자는 이안의 옆을 노려 세아를 향해 다시 한번 에너지 파동을 쏘았다. 이안은 몸을 날려 세아를 밀쳐냈고, 파동은 그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시간 관리국? 그 망할 놈의 조직이 아직도 건재하다니…!”

이안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시간 관리국. 잊힌 과거의 한 조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그 섬광 속에서 보았던 푸른 장치와 흰 가운들, 그리고 차가운 눈빛의 여인… 그들이 시간 관리국과 관련이 있을까?

집행자는 이안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흉터로 일그러진 그 미소는 섬뜩했다.

“흥미롭군.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는가? 네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우리의 계획에 더욱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저 변수는… 방해물에 불과해.”

그는 세아를 향해 다시 한 발짝 다가섰다. 이안은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린 기억, 자신의 정체, 자신이 시간 여행자가 된 이유…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는 세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다.

선택은 명확했다. 그는 과거를 쫓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세아! 어서 피해!”

이안은 소리쳤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집행자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이 스치려 했지만, 이안은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쾅!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선술집의 벽이 부서졌다.

이안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펜던트였다. 그가 이전에 보았던, 잊힌 기억 속의 여인이 들고 있던 펜던트와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그 순간, 집행자의 몸이 섬광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임무는 실패했지만, 그가 남긴 펜던트는 이안에게 또 다른 수수께끼를 던졌다.

“이안 씨…!”

세아는 그의 옆에 쓰러진 이안을 부축했다.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펜던트를 꽉 쥐었다. 그는 여전히 기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시간의 방랑자가 아니었다.

시간 관리국. 델타. 펜던트. 그리고 세아의 정체.

잃어버린 과거가 그를 향해 다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이안은 자신이 지켜야 할 빛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