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421화

밤하늘이 짙푸른 벨벳처럼 드리워진 시각, 도시의 불빛마저 희미해지는 고요 속에 오직 별들만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합니다. 이곳,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스튜디오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점들은 때론 우리의 아득한 기억을, 때론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닮아 있죠.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밤을 지키는 디제이 지훈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분들이 잠 못 드는 밤을 함께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내일의 시험을 걱정하며, 어떤 분은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며, 또 어떤 분은 그저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모든 마음들이 저마다의 별이 되어 반짝이는 밤, 저의 목소리가 여러분의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억의 별똥별

첫 곡으로 이소라 씨의 ‘바람이 분다’를 들려드렸습니다. 왠지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곡이죠. 이 곡을 들으니, 오늘 도착한 한 통의 사연이 떠오릅니다. 익명으로 보내주신 ‘밤별 지기’ 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지인데요, 함께 들어볼까요?

“디제이 지훈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어릴 적부터 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들은 저를 ‘밤별 지기’라고 불렀어요. 오늘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건,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너무나 잊고 지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거예요. 여름방학, 시골 외갓집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또래 아이가 있었어요. 이름은 준서였습니다. 준서는 도시에서 온 제가 마냥 신기했는지, 매일 저를 졸졸 따라다녔죠. 어느 날 밤, 준서는 저를 데리고 동네 뒷산 언덕에 올랐어요. 그곳은 작은 망원경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간이 천문대 같은 곳이었는데, 사실은 마을 주민들 몇 명이 취미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죠.

그날 밤은 유독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어요.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자리… 준서는 저보다 별자리 이름도 훨씬 많이 알고 있었죠. 저는 그날 처음으로 망원경으로 토성의 고리를 봤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나요. 그때 준서가 말했어요. ‘야, 저기 봐! 별똥별이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별똥별이 밤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저희는 그 별똥별을 보며 손가락 걸고 약속했어요. 10년 뒤, 오늘처럼 별이 쏟아지는 여름밤에, 다시 이 언덕에 모여 별똥별을 함께 보자고. 그 별똥별이 우리에게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요. 유치하고 순진한 약속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죠. 하지만 그 여름방학이 끝나고 저는 이사했고, 준서와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언덕도, 그 약속도, 제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갔죠.

그런데 오늘, 뉴스에서 10년 주기로 지구에 가까워지는 어느 혜성의 소식이 들리더군요. 그제야 저는 잊었던 그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제 마음 한구석이 쨍하게 아려왔어요. 준서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혹시 저처럼 밤하늘을 보며 그때를 추억하고 있을까요? 그저 잘 지내고 있는지, 별이 빛나는 이 밤에 문득 궁금해집니다.

스쳐가는 인연의 별

밤별 지기님의 사연, 정말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어릴 적 순수한 약속 하나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 중에는, 저렇게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짧지만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인연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 흔적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언젠가 문득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는 거죠.

저도 밤별 지기님의 사연을 들으니, 오래전 친구와 나눴던 엉뚱한 약속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때는 그 약속이 너무나 중요했는데, 지금은 그 친구의 얼굴조차 희미해져 버렸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억 속에 저마다의 별똥별을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사연은 ‘은하수 관측자’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지훈 디제이님, 밤별 지기님의 사연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요. 저에게도 어린 시절 헤어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아이와 저는 낡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써주며 약속했어요. 언젠가 어른이 되면, 각자의 편지를 들고 그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만나자고요. 이제 그 공중전화 부스는 사라졌겠지만, 저는 아직도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그럴까요? 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꼭 소식을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계시는군요. 이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그리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있고, 때로는 가까이 있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인연의 별빛이 우리의 가슴속에 얼마나 선명하게 남아있느냐 하는 것이겠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목소리

밤별 지기님의 준서 씨도, 은하수 관측자님의 친구분도 이 라디오를 듣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 밤에 이 주파수 위에서 여러분의 추억이 만나게 된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우연은 없을 거예요.

다음 곡 듣고 오겠습니다. 김광석 씨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입니다. 잠시 추억에 잠겨보시죠.

… (음악 재생) …

노래 잘 들으셨나요? 지금 막 제게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라 깜짝 놀랐네요. 발신인은 ‘별똥별 사냥꾼’ 님입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디제이님, 방금 전 밤별 지기님의 사연… 잊고 지냈던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주는 것 같아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별똥별 사냥꾼’이었거든요. 저는 제가 그 아이에게 ‘밤별 지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여름밤, 토성의 고리를 망원경으로 보며 신기해하던 그 아이의 눈빛, 그리고… 손가락 걸고 했던 약속까지도요. 저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언덕도, 언젠가 다시 그 아이와 함께 오르리라 다짐하며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혜진아… 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꼭 소식을 전해다오. 나는, 너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게. – 별똥별 사냥꾼으로부터.”

이건… 이건 정말 놀라운 우연이네요. ‘밤별 지기’님과 ‘별똥별 사냥꾼’님. 이 두 분이 찾던 서로가 정말 이 주파수 위에서 만난 것일까요? 제가 다 가슴이 떨립니다.

혜진님, 혹시 이 메시지를 듣고 계시다면… ‘별똥별 사냥꾼’님께서 당신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길 바라고 계십니다. 저는 이 기적 같은 만남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의 이야기를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작되려 합니다. 저는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디제이 지훈이었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