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아틀리에의 차가운 공기가 지우의 코끝을 스쳤다. 새벽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창밖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지우의 마음은 이미 한겨울의 칼날 같은 시린 바람 속에 서 있는 듯했다. 작업대 위에는 반쯤 형태를 갖춘 백자 화병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고, 흙의 눅진한 냄새 대신 알 수 없는 불안의 그림자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작업대 한구석에 놓인 작은 세라믹 눈꽃 장식을 만졌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 투박하지만 섬세하게 새겨진 눈꽃 문양. 그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그녀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날, 함박눈이 쏟아지던 겨울 산자락에서, 현우와 함께 만들었던 첫 눈꽃 조각이었다.
“지우야, 이 눈꽃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약속을 하자.”
풋풋했던 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눈빛은 그 겨울의 순백만큼이나 티 없이 맑았고, 두 손을 마주 잡았던 온기는 추위마저 녹일 듯 따뜻했다. 무슨 약속이었을까. 구체적인 단어들은 시간의 눈밭에 파묻혀 희미해졌지만, 그날의 맹세가 담고 있던 절대적인 신뢰와 미래에 대한 맹목적인 희망만은 선명하게 남아 지우의 가슴을 저몄다.
그러나 지금, 그 약속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금이 가 있었다. 지난주 현우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갤러리 매각 결정’은 지우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함께 일구어 온 공간이자, 그녀의 예술 혼이 깃든 전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유를 물었을 때 현우는 그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고만 답했고,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리 깊은 수심과 알 수 없는 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단호함이 지우에게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들의 약속을 그는 정말 잊은 걸까, 아니면 그 약속조차도 그의 ‘더 나은 미래’ 속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까.
덜컥, 아틀리에 문이 열리며 희미한 벨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소담한 꽃다발을 든 선우가 서 있었다. 지우의 유일한 친구이자 현우의 오랜 비서이기도 한 선우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우야, 이 시간에 벌써 나와 있었어? 내가 늦었네.”
선우는 꽃다발을 작업대 한편에 내려놓으며 지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어젯밤 잠을 설쳤어. 현우 씨가… 정말 갤러리를 팔려는 건가?”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선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우 대표님, 요즘 밤샘이 잦아. 잠시도 쉬는 걸 못 봤어. 물론 지우 씨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결정에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른 이유? 나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만큼 중요한 이유가 대체 뭔데? 선우야, 너도 알잖아. 그 갤러리가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현우 씨는 늘 나와 함께 꾸려가자고 했어. 평생 내 도예를 전시할 공간이라고… 그때 그 눈꽃의 약속처럼.”
선우는 지우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우 씨, 현우 대표님이 그 약속을 잊었을 리 없어. 아마… 아니, 분명 지우 씨를 위해서일 거야. 내가 아는 대표님은 늘 그래왔어.”
그러나 지우의 마음은 이미 차가운 벽을 쌓아 올린 뒤였다. 현우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순간마다, 그녀는 어쩐지 더 깊은 상처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에는 늘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모르게 비어 있는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그때, 선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선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잠시 망설이던 선우는 지우의 눈치를 살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내용은 길지 않았다. 몇 마디 짧은 대답 끝에 선우는 굳은 얼굴로 지우를 바라봤다.
“방금 현우 대표님 비서한테 연락 왔어.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에 지우 씨와 잠시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갤러리 계약 건으로 중요한 이야기가 있대.”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갤러리 매각이 확정되는 것일까. 그녀는 현우의 눈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진실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오후 3시, 약속 장소인 작은 카페 창가에 앉아 지우는 현우를 기다렸다. 카페 안은 따뜻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겨울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익숙한 현우의 실루엣이 들어섰다. 며칠 밤을 새운 듯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는 강인함으로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낡은 가죽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현우는 지우 맞은편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거예요? 갤러리 매각… 최종 결정하려는 건가요?” 지우는 묻고 싶지 않았던 말을 기어코 뱉어냈다.
현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서류철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지우에게 내밀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이었다. 그들의 풋풋했던 대학 시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산자락에서 두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현우의 손에는 작은 세라믹 눈꽃 조각이 들려 있었다.
“기억나? 그때 우리가 만든 첫 눈꽃.” 현우는 사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 우리가 약속했지. 이 눈꽃처럼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의 꿈을 지켜주자고.”
지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다. 구체적인 단어는 잊었지만, 그 핵심은 서로의 꿈을 지켜주자는 맹세였다. 그럼 지금 현우의 행동은 무엇인가? 자신의 꿈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내 꿈은… 현우 씨가 짓밟고 있잖아요.” 지우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랬어요?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갤러리를 팔려고 해요?”
현우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우야. 네 꿈을 지키기 위해서였어. 아니, 네 삶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
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서류철에서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대한투자개발]이라는 생소한 회사 이름이 박힌 공문이었다. 공문 내용은 지우의 갤러리 부지가 포함된 일대의 대규모 재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통지서였다. 갤러리가 있는 땅이 강제 수용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지우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강제 수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이 일대를 모두 매입하고 있어. 처음엔 단순한 제안인 줄 알았지.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거부하면 결국 강제 수용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네가 갤러리를 운영하며 온전히 작품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현우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지우는 혼란스러웠다. 현우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 그리고 그의 피곤한 얼굴.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꿈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였단 말인가. 갤러리 매각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이 사실은 최악을 막기 위한 현우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을 깨닫자, 지우의 가슴속에 날카로운 후회와 함께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바로 그때, 카페 문이 다시 열리며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화려한 코트를 입은 한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현우와 지우를 번갈아 응시했다. 여인의 손에는 현우와 똑같은 [대한투자개발]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현우 씨, 일이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네요. 저도 이 모든 상황이 빨리 정리되었으면 하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신가 봐요?” 여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숨겨진 비아냥거림이 지우의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어쩌겠어요.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그리고 지우 씨, 당신 갤러리의 가치…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녀는 현우의 옆에 다가서더니, 현우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손을 올렸다. 현우는 순간 몸을 움찔하며 그녀의 손을 떨쳐냈지만, 이미 지우의 시선은 얼어붙은 듯 차갑게 고정되어 있었다. 현우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가벼운 눈꽃들이 하늘에서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갔다. 그러나 지우의 마음은 더욱 깊은 겨울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현우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저 여인이 모든 상황을 알고 현우를 압박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릴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깊어진 것일까?
지우는 차가운 테이블 위에 놓인 빛바랜 사진 속의 현우와,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현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 순수했던 눈꽃의 약속은 과연 이 겨울의 눈꽃처럼 흔적 없이 녹아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진실을 파헤칠 씨앗이 될 것인가.
그녀는 사진 속 자신의 미소를 보며, 결심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갤러리, 현우, 그리고 그들의 약속. 이 모든 것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는 이제 진실의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