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는 눈꺼풀을 비볐다. 자정 너머, 그의 사무실 창밖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 수백 번은 더 들여다봤을 사진 한 장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십대 시절, 벚꽃이 흩날리던 공원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 서소연. 그의 첫사랑이자, 지난 20년간 그의 삶을 지배해온 숙명.
그는 탐정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이토록 무모한 집착을 이어가는 것도 오직 소연 때문이었다. 수많은 단서들이 그의 손을 스쳐 지나갔고, 수많은 실망이 그의 가슴을 찢었다. 하지만 포기란 없었다. 포기하는 순간, 그의 삶 전체가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이 기나긴 추적은 그에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오래된 사건 파일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검토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박스들. 그러다 우연히, 구석진 곳에 놓인 종이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두껍게 쌓인, 마치 존재 자체를 잊힌 듯한 상자. ‘1998년_교내사진전_입상작_잔여물’이라고 삐뚤빼뚤 쓰인 글씨. 소연이 고등학교 시절, 잠시 사진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희미한 기억이 스쳤다. 그는 그 시절 소연이 잠시 흥미를 보였던 모든 것에 대해 기록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바싹 마른 나뭇잎 하나가 굴러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 몇 장과 작은 스크랩북이 들어 있었다. 사진들은 대부분 학교 풍경이나 친구들의 모습이었고, 소연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스크랩북의 마지막 장, 거의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쪽지 하나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성호 스튜디오. 인화 잘 해줘서 고맙습니다. 소연 드림.』
성호 스튜디오. 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소연의 자필이었다. 십대 소연이 남긴 흔적 중, 그가 몰랐던 유일한 것이었다. 스튜디오 이름은 낯설었다. 그의 기억 속에는 없는 곳. 지난 20년간 수많은 기록을 뒤져왔지만, 이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단서. 2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다음 날 새벽, 진우는 성호 스튜디오를 찾아 나섰다. 낡은 종이 쪽지 하나를 들고 20년 전 주소지를 찾아 헤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옛 지도를 뒤지고, 동네 노인들에게 묻고 물어 간신히 찾아낸 곳은 더 이상 스튜디오가 아니었다. 낡고 허름한 건물 1층에는 다방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유리창 안은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텅 빈 공간은 스산한 기운마저 풍겼다.
희미한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건물 옆 건물주로 보이는 작은 가게에 들어가 수소문했다. 주인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성호 스튜디오 말이여? 에이, 그 영감탱이 죽은 지가 언젠데. 아들이 물려받았나 싶더니, 몇 년 전 건물을 팔고 다 지방으로 이사 가 버렸어. 다방 주인도 벌써 몇 번 바뀌고 말여.”
쿵. 다시 한번 진우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20년의 세월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음을 새삼 깨달았다. 겨우 찾아낸 단서마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가. 그는 절망감에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는 그가 실망한 표정을 읽었는지, 혀를 쯧쯧 찼다.
“근데, 그 영감탱이가 손재주가 좋았지. 필름을 어찌나 잘 다뤘는지. 동네 사람들 사진은 죄다 거기서 찍었어. 아, 그러고 보니 영감탱이 보물 상자라고, 자기 작업실에 오래된 필름이랑 인화지 같은 거 모아둔 게 있었는데. 건물 팔고 나서도 아들이 그거 버리질 못하고, 뭐 ‘추억이 있는 건데 어찌 버리냐’면서 자기 시골집 창고에 넣어둔다고 하더라. 어디더라… 강원도 홍천 어디쯤이라고 했었나.”
강원도 홍천.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는 지명이었다. 소연의 외가가 홍천에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소연과 함께 외갓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그의 마음속에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금 거대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진우는 다시 차를 몰았다. 밤새도록 국도를 달리고, 이른 아침 홍천의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알려준 주소를 토대로 수소문 끝에, 그는 마침내 낡은 목조 주택 앞에 섰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삐걱거리는 대문은 오래도록 열리지 않은 듯했다. 성호 스튜디오 주인의 아들은 이미 타지로 떠나 비어있는 집이었다. 인기척 없는 빈집 앞에서 진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담벼락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섰다. 시골집 뒤편에 허름한 창고가 보였다. 녹슨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었다. 진우는 준비해 온 도구로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부쉨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열렸다. 안은 온통 먼지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다.
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낡은 상자들, 빛바랜 가구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필름 통과 사진 상자들. 그것들은 마치 시간의 강물 속에 갇힌 보물선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죽이고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를 열었다.
수많은 필름 롤과 인화지 더미들 사이에서,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얇고 오래된 나무 액자였다. 액자 속 사진은 빛바래 흐릿했지만, 그의 눈은 한순간 모든 것을 꿰뚫었다. 사진 속에는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살짝 기울어진 고개, 그리고 입가에 드리운 희미한 미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앳된 얼굴의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여인의 모습은 분명했다. 진우는 사진 속 여인의 눈매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젊은 시절의 소연과는 사뭇 달랐지만, 특정 각도에서 보이는 그 특유의 눈빛,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그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했다. 손에 들린 액자가 그의 심장박동에 맞춰 떨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움켜쥐었다. 사진 뒷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무엇인가.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20년 동안 찾아 헤맨 소연의 모습이 정말로 이 사진 속에 담겨 있는 것일까? 옆의 아이는 누구일까? 그녀의 아이일까?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진우는 사진을 가슴에 품었다.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20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회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사진 한 장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모든 고통과 희망의 증거 같았다. 마치 오랜 방황 끝에 겨우 잡은 낡은 닻처럼, 그의 모든 것을 붙잡고 있었다.
창고 밖으로 나오자 동이 트기 시작했다. 희미한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손에는 낡은 사진 액자가 들려 있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매던 긴 여정의 끝이 다가오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한 것일까.
진우는 사진 속 여인의 눈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소연아, 정말 너인 거니?
그리고… 이 아이는 누구지? 내… 아이일까?
그의 심장은 아침 해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