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는 희미한 가스등 불빛 아래로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는 눈송이들은, 마치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내려는 듯 부지런히 춤을 추며 내려앉았다. 서소율은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설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계절이 이렇게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겨울이 왔고, 그때마다 약속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기억 속의 발자국
“소율아,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는… 이 눈처럼 예쁜 꽃이 피어 있을 거야.”
귓가에 맴도는 연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열여덟 살의 겨울,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작은 언덕 위에서,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그 날. 연우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작은 나무 조각 목걸이를 풀어 소율의 목에 걸어주며 그렇게 속삭였다. 그때의 눈송이들은 지금처럼 차갑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뜨겁게 타오르는 맹세처럼, 두 어린 영혼을 감싸 안는 온기였다.
소율은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 그 나무 조각을 어루만졌다. 세월의 흐름 속에 나무는 닳고 빛을 잃었지만, 그 안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만큼은 선명했다.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마주 보고 날개를 펼친 형상. ‘언젠가 다시 함께 날아오르자’는 연우의 다짐이었다.
“연우야… 너는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공허한 질문은 차가운 유리창에 김을 서리게 만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연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을 통해 그를 찾으려 했지만, 그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든 기록에서 지워져 있었다. 절망의 나날들이 이어질 때마다 소율을 붙잡아 준 것은 오직 그 겨울 눈꽃 아래 맺었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있기에, 그녀는 삶의 폭풍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낼 수 있었다.
차가운 소식
때마침 울린 핸드폰 진동에 소율은 현실로 돌아왔다. 액정에 뜬 이름은 오랜 친구인 지혜였다.
“소율아, 너 지금 괜찮아? 혹시… 뉴스 봤어?” 지혜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소율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연우… 이연우 대표. 지금 회사가 난리 났어. 어제부터 주가 폭락에, 온갖 루머가 다 터지고… 아마 김상훈 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것 같아.”
연우의 이름. 지혜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소율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연우 대표라니. 그녀가 알던 연우는 그저 꿈 많던 고등학생이었다. 어떻게 그가, 그리고 왜 지금 이 순간에, 지혜의 입에서 이런 식으로 언급될 수 있는 걸까.
“이연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혜야? 확실해?” 소율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어떻게 몰라, 네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그 이연우잖아! 한서 그룹의 이연우 대표! 어제 그 사건 때문에 얼굴이 대중에 공개됐어. 사진도 다 퍼졌고… 너 진짜 몰랐던 거야?”
소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급히 노트북을 켰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연우’ 세 글자를 입력했다. 화면 가득 쏟아지는 기사와 사진들. 그 속에는 10년 전, 눈 덮인 언덕에서 그녀에게 약속했던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세월의 흔적과 고뇌가 깊게 새겨진, 그러나 여전히 변치 않은 그의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은 지금, 지독히도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듯했다.
결단의 눈꽃
뉴스 기사는 연우가 운영하는 회사가 거대 기업 김상훈 대표의 계략에 휘말려 부도 위기에 처했으며, 그를 제거하기 위한 모략이 수년 전부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연우는 고아원에서 자라 스스로의 힘으로 기업을 일궈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독한 싸움을 혼자서 견뎌내고 있었다.
소율은 사진 속 연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는 결연한 의지도 담겨 있었다. 10년 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너를 다시 만날 때까지”라고 맹세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지, 연우야.”
소율은 주머니 속에 있던 나무 조각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이 손안에서 그녀의 뜨거운 결심으로 인해 데워지는 듯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이대로 연우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약속의 사람이었다.
밤늦도록 눈은 계속 내렸다. 소율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발밑에 쌓인 눈은 뽀드득 소리를 내며 그녀의 걸음에 맞춰 부서졌다. 멀리 빛나는 도시의 불빛 사이로, 연우가 홀로 서 있는 듯한 환영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그 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연우는 이렇게 말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는 날의 약속은, 아무리 추운 바람에도 얼어붙지 않는 법이야.”
그녀의 볼에 차가운 눈송이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그녀의 결심을 응원하듯. 소율은 연우를 찾아야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약속이 아직 살아있음을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밤의 공기 속에서, 그녀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