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433화

밤의 장막이 푸른 별빛을 머금고 도시를 감쌀 때, 지우는 익숙한 스튜디오의 온기 속에 앉아 있었다. 낡았지만 그녀의 손때가 묻은 헤드셋을 착용하고, 눈앞의 마이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창밖의 세상은 점차 고요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스튜디오만큼은 언제나처럼 수많은 목소리와 이야기로 가득 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밤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DJ 지우입니다. 쌀쌀한 밤공기 속에 따스한 별빛이 가득한 밤입니다. 오늘 밤도 여러분의 외로운 마음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어드릴게요.”

지우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었다. 첫 곡이 흐르는 동안, 지우는 오늘 방송에서 읽을 사연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중, 유독 한 통의 사연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별을 헤는 아이’라는 닉네임의 청취자로부터 온 편지였다.

별을 헤는 아이로부터

“지우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매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헤는 것을 좋아하는 스무 살 청년입니다. 오늘 밤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시립니다. 어릴 적, 가장 친했던 친구와 나눴던 약속이 문득 떠올라서요. 우리는 함께 언덕 위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별을 보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다시 만나 그 별들처럼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삶이라는 게 늘 그렇듯, 우리는 너무 쉽게 흩어졌고, 저는 그 친구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약속은 점차 희미해지는 것 같았지만, 가끔 이렇게 밤하늘을 보면 그 친구의 얼굴이 별들 사이에 떠오르곤 해요. DJ님은 혹시, 이렇게 이루지 못한 약속에 대해, 혹은 전하지 못한 작별 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 친구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별을 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저희 둘만 알던, 그 별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밤하늘의 등대’를 신청합니다. 그 친구가 이 노래를 듣고, 혹시 저를 떠올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우의 손이 편지를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언덕 위의 느티나무 아래’, ‘별의 약속’ 그리고 ‘밤하늘의 등대’…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이 모든 단어들이, 단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바래가던 한 시절, 한 소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윤호…?’

그 아이와 지우는 어릴 적, 마을 뒷산 언덕의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늘 함께 별을 보았다. 지우는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고, 윤호는 지우의 그림에 나오는 별들처럼 빛나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다. 언젠가 각자의 꿈을 이루고,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고. 영원히 함께하자고. 그때 윤호는 지우에게 “지우야, 이 별은 마치 밤하늘의 등대 같지 않아?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주는…” 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약속의 노래는 ‘밤하늘의 등대’가 되었다.

하지만 고작 열세 살의 여름, 윤호는 말없이 전학을 가버렸다. 아무런 예고도, 작별 인사도 없이. 어린 지우는 매일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윤호를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고, 윤호는 지우의 아픈 기억 속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이름이, 그의 추억이, 이렇게 불쑥 그녀의 방송에 나타났다.

지우는 마이크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깊고, 미묘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이 사연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별을 헤는 아이’는 윤호이거나, 아니면 윤호가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터였다.

“별을 헤는 아이님, 그리고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실 그 모든 분들께. 이루지 못한 약속, 전하지 못한 작별 인사는 가슴 한켠에 오래도록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 약속이 진심이었다면, 그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언젠가는 그 별빛처럼 다시 만날 길이 열릴 거라고요.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마음은 언제나 서로를 향한 등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우는 숨을 고르고, 이젠 윤호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그 언덕 위의 느티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에서, 매일 밤하늘의 등대가 되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길을 잃었거나, 잠시 잊고 있었던 별의 약속을 기억해냈다면, 언제든 이곳으로 다시 찾아와 주세요. 그 별빛 아래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거의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신청곡 ‘밤하늘의 등대’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멜로디는 잔잔했지만, 지우의 가슴속에서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 노래가 그의 귀에 닿기를, 그리고 그녀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방송은 예정대로 마무리되었다. 지우는 엔딩 멘트를 마치고 헤드셋을 벗었다.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해졌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여전히 격랑이었다. 그때, 책상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깊어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야…”

그 한마디에, 20년의 세월이 무너져 내렸다. 지우는 입을 틀어막고,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길을 잃었던 두 개의 별이 마침내 서로를 향한 등대를 찾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