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얇은 명주 커튼을 가만히 통과해 방 안을 온화하게 감쌌다. 창밖으로는 연분홍빛 벚꽃잎들이 춤추듯 바람에 실려 흩날리고 있었다. 해묵은 기와지붕 아래, 윤서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옅은 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 작은 한옥의 평화로운 아침은, 그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먹먹한 그리움을 가끔씩 건드리고는 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듯, 그 파문은 작지만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윤서는 자신을 덮쳐왔던 비바람을 견뎌내고 이 고요한 안식처에 정착했다. 상실과 고통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봄바람이 상처를 어루만지듯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들을 고요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 어떤 거센 파도도 그녀를 집어삼키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살아왔다.
그때였다. 낡은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작고 초췌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윤서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여 마당을 가로지르는 여인을 향했다.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였다. 몇십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기억 저편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그 노파는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마을 어른’이었다. 윤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마다 익숙한 마루가 작게 삐걱거렸다.
“할머니… 어인 일이세요?”
윤서의 목소리는 마치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악기처럼 낮고 잠겨 있었다. 노파는 아무 말 없이 윤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알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파의 손에는 닳고 닳은 천 조각에 싸인 작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윤서의 심장이 한순간 불길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천 조각, 그 색깔, 그 낡은 모양새… 잊으려 애썼던 기억의 파편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파는 천천히 싸여 있던 것을 풀어내 보였다. 그 안에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나무 조각상이 있었다. 정교하게 깎아 만든 작은 새 모양의 조각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나무결 사이사이 파고든 시간의 때가 그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이건…”
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십수 년 전, 그녀가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숲길을 헤맬 때, 한 노인이 건네주었던 작은 희망의 조각이었다. 그 아이, 지호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 새.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웃곤 했던… 그 작고 귀여운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노파는 조각상을 윤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갑고 단단한 나무의 감촉이 윤서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노파의 입술이 마른 가지처럼 움직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윤서의 귓가에 닿았다.
“그 아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답니다.”
그 한마디에 윤서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니. 몇 번이고 되뇌었던 절망적인 문장이었다. 잃어버렸다고, 죽었을 것이라고, 모든 것을 단념하고 체념하며 살아왔던 세월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독한 환상일 뿐이라고, 이 잔인한 봄바람이 가져온 또 다른 시험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지호는… 지호는 이미…”
윤서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노파는 윤서의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그녀의 손과는 달리 노파의 손은 따스하고 단단했다.
“강 건너 작은 마을에… 얼마 전, 이 나무 새와 똑같은 것을 품에 안고 있는 아이가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나이는… 그 아이와 비슷할 겁니다.”
노파의 말에 윤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강 건너 작은 마을. 어둠과 절망 속에서 헤매다 겨우 지호를 포기해야만 했던 그때, 그 아이를 맡겼던 곳은 먼 친척이 운영하던 강 건너 마을의 작은 절이었다. 병든 자신으로는 더 이상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절박함에 내렸던 비극적인 결정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비보와 함께 지호가 불 속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몇 년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맸지만, 아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지호는 그녀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든 아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노파가, 수십 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나, 사라졌던 나무 새를 들고,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윤서는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그녀의 눈에 비친 노파의 얼굴은 슬픔과 함께 어떤 희망의 빛을 담고 있었다.
노파는 윤서의 손에 든 나무 새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새는… 늘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법이지요. 아무리 깊은 절망 속에서도, 다시 날아오를 희망을 품고 기다립니다. 이 아이도 그랬을 겁니다.”
윤서는 고개를 들어 마당을 바라보았다. 벚꽃잎들이 흩날리는 풍경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봄바람은 더 이상 고요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졌던 희망의 속삭임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다시 찾아 나서라는 준엄한 명령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이 흘렀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격정적인 감정이었다. 다시 한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어쩌면 그녀의 지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단 한 줄기 빛. 이젠 외면할 수 없었다.
윤서는 땀으로 축축한 손에 쥐어진 나무 새를 꽉 움켜쥐었다. 그 작은 새의 감촉은 그녀의 심장과 맥박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본능이, 맹렬한 불꽃처럼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이 작은 한옥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 고요한 평화는 그녀에게 사치였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그녀의 삶에 다시금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기 위한 여정. 그것이 설령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이제 외면할 수 없었다. 강 건너 작은 마을, 그곳으로 향해야만 했다. 윤서의 눈빛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굳건한 의지가 스며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