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서울의 빽빽한 아파트 숲 위로 드문드문 박힌 별들은, 창밖으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에 흐릿하게 그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지우는 낡은 라디오의 다이얼을 매만지며 작은 스튜디오형 아파트의 유일한 빛, 스탠드 조명 아래 앉아 있었다. 붓과 물감은 잠시 옆으로 밀쳐두고, 연필 한 자루만 든 채 스케치북에 아무렇게나 선을 긋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DJ 은하의 차분하고도 따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에 도착한 많은 사연 중, 유난히 제 마음을 잡아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 지켜내지 못한 약속. 여러분은 그런 추억을 안고 살아가고 계신가요? 어쩌면 그 약속은 타인에게 한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게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그 별들을 보며, 잠시 잊고 살았던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겨보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우의 손이 멈췄다. 스케치북 위에는 알 수 없는 형상의 얼룩만 번져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꿈의 잔해처럼. 그녀의 눈은 저절로 창밖의 희미한 별들을 향했다. 은하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부드럽게 지우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잊고 살았던 약속.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완전히 잊은 적 없는 그것.
별들의 약속
그날 밤은 유난히 별이 많았다. 옥상 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나란히 누워 한없이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던 스무 살의 지우와 현우. 현우는 지우의 손을 꼭 잡고 밤하늘을 가리켰다.
“봐, 지우야. 백조자리야. 마치 날개를 펼치고 밤하늘을 유영하는 것 같지? 언젠가 내가 너를 위해 저 백조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작업실을 만들어줄게. 그럼 넌 그곳을 별처럼 반짝이는 그림들로 가득 채워줘. 어때?”
지우는 현우의 눈을 바라봤다. 별빛이 그대로 스며든 듯 반짝이는 눈이었다. “응! 물론이지! 그럼 나는 네가 지어준 작업실에서 저 별들을 다 담아낼 그림을 그릴 거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별들의 화가가 될게.”
두 손을 맞잡은 채, 그들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약속을 했다. 서툰 사랑만큼이나 뜨겁고 맹목적인 꿈을 꾸었다. 지우는 현우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따뜻한 체온과 꿈결 같은 별빛 아래에서, 그들의 미래는 한 점 의심 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흐려진 별빛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현우는 돌연 사라졌고, 지우의 캔버스 위에는 더 이상 빛나는 별들이 자리하지 않았다. 꿈을 잃은 지우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야근에 찌들어 퇴근하고 나면, 붓 대신 서류 더미를 마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가끔 밤늦도록 잠 못 이루는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은하의 목소리만이 그녀의 메마른 감성을 간신히 붙들어 매주었다.
이번 달 초, 잊고 있던 이름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우와 함께 미술 동아리 활동을 했던 선배, 김민준이었다. 그는 지우에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지우야, 네 그림 아직도 그리지? 예전에 네 그림 참 좋았는데. 이번에 작은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어. 신진 작가 발굴 프로젝트인데, 네 작품을 몇 점 전시하고 싶다. 네가 잠시 쉬는 동안에도 계속 그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 현우에게 들었거든.”
현우에게 들었다니. 그 한마디가 지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냐는 질문에 지우는 선뜻 ‘네’라고 답할 수 없었다. 취미로 끄적이는 스케치는 많았지만, 과거의 열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직장을 관두고 전시에 매달릴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이미 한 번 꺾였던 날개로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그녀는 민준 선배에게 며칠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지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은하의 목소리는 지우의 귓가에 현우의 옛 약속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듯했다. 스케치북 옆에 무심하게 놓인 휴대폰 액정이 눈에 들어왔다. 민준 선배에게 아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거절할까, 아니면 한 번 더 도약해 볼까. 지우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나에게 해준 약속을 지키기 위한 용기. 그 약속이 과거의 상처와 얽혀 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별을 향해 손을 뻗어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이 노래, 멜로망스의 ‘별 보러 가자’를 들으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꿈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멜로망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채웠다. ‘오랜만에 별 보러 가지 않을래 / 너와 단둘이서…’ 노래 가사 하나하나가 지우의 마음에 아련하게 스며들었다. 현우와 함께 보았던 밤하늘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희미하게 반짝이는 백조자리가 보였다. 현우가 가리켰던 그 자리였다. 마치 그때처럼, 자유롭게 날아가는 백조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다시, 별을 향해
지우는 스탠드 불빛 아래로 돌아와 붓과 물감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은 사라지고, 오직 무언가에 홀린 듯한 충동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스케치북이 아닌, 캔버스 위에 물감 번지듯이 흐릿한 별들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 밤하늘을 유영하는 백조의 형상을 그려 넣었다. 그녀는 더 이상 현우와의 약속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지우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다시 한번 별들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은, 자신의 오래된 열망을 마주하고 싶었다.
밤은 깊었지만, 지우의 작업실에는 서서히 새로운 새벽이 밝아오는 듯했다. 붓질은 망설임 없이 이어졌다. 백조는 점점 더 생명력을 얻어갔다. 지우는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잠시 바라보다가, 옆에 놓인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민준 선배에게 답장을 보냈다.
‘선배, 연락 감사합니다. 전시회 참여하고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언제 논의 가능할까요?’
전송 버튼을 누르자, 지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미약하지만 분명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백조의 날개에 마지막 터치를 더했다. 라디오에서는 은하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여러분, 오늘 밤도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여러분의 밤하늘은 언제나 빛나고 있을 겁니다. 내일 밤 다시 찾아올게요.”
별들은 여전히 희미했지만, 지우의 마음속에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 별들을 향해 다시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아닌, 오직 자신만의 빛으로 가득 찬 밤하늘을 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