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438화





차가운 겨울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고, 대지는 생명의 기운으로 꿈틀거렸다. 고목 가지마다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고, 마당 한편의 매화나무는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며 향긋한 기별을 전하고 있었다. 윤희는 툇마루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랑이는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잊었던 이름들이 속삭이듯 귓가에 맴돌았다. 매년 봄이 올 때마다 그녀의 가슴 한켠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알 수 없는 서글픔이 찾아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약속된 계절병처럼, 피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였다.

반백 년도 더 된 세월이었다. 난리통 속에 잃어버린 막내딸, 지우. 어린 지우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열 살 남짓의 천진한 미소로 그녀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주변의 많은 것이 변하고 사라졌지만, 그 아이의 모습만은 시들지 않는 사진처럼 선명했다. 과연 지우는 살아 있을까? 어디선가 무사히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던졌던 질문들은 바람에 흩어지는 헛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녀의 곁으로 손자 하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 우편물이에요. 멀리서 온 것 같아요.”

윤희는 눈을 뜨고 봉투를 받아들었다. 낡고 바랜 봉투에는 낯선 필체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발신지는 이국의 도시, 수천 리 떨어진 곳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하면서도, 동시에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 같은 예감이 스쳤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하준은 할머니의 불안한 기색을 읽었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옆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할머니?”

윤희는 대답 없이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얇게 접힌 편지 한 장과 작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낯선 중년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너 살쯤 된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윤희의 눈길은 사진 속 여인의 얼굴에 머물렀다.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슬픔과 희미한 희망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이 그녀를 휩쓸었다.

이윽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정성스럽게 눌러 쓴 글씨는 서툴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이모할머니께,

저는 이향기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받으셨을 때쯤이면 저는 아마도 당신을 직접 찾아뵙기 위해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당신의 마음속에 자리했을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야 전해드리게 되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저의 할머니는 ‘이향란’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베트남의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는 늘 한국에서의 기억, 특히 어미니와 오빠, 언니들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 헤어졌던 자신의 어머니, 윤희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할머니의 눈빛에 항상 배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머니와 헤어지던 날의 봄바람, 그리고 마당에 피어 있던 노란 꽃들의 향기를 잊지 못하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한국에 계신 가족을 찾아드리고 싶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할머니는 작년에 향년 88세로 편안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당신의 가족들을 그리워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유품 속에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왔던 작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사진 속의 당신의 젊은 모습과 어린 소녀의 모습, 그리고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한국 집의 풍경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당신이 보냈던 것이라는 것을, 제가 이곳에서 수소문한 끝에 알게 되었습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당신의 주소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막내딸, 지우가 바로 저의 할머니 ‘이향란’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좋은 분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세 아이의 어머니로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비록 평생 가족을 그리워하셨지만, 삶의 모든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사진은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과, 저의 어릴 적 모습입니다. 당신의 지우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갔습니다.

이 소식이 당신께 부디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당신을 만나뵙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을 담아,
손녀 이향기 올림

편지를 다 읽은 윤희의 손에서 종이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메말랐던 눈물샘이 비로소 제 기능을 찾은 듯,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하준은 놀라 할머니를 부축하며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윤희는 흐느낌 속에서도 희미하게 미소 지으려 애썼다. “지우… 우리 지우가… 살아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편안하게 갔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잠기고 먹먹했다. 슬픔과 안도, 상실감과 해방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파도였다.

사진 속의 여인을 다시 보았다. 그 여인의 눈매에서, 희미하지만 어린 지우의 흔적이 느껴졌다. 한평생을 기다려온 소식. 살아있다는 확인. 그리고 그녀가 행복하게 살다 갔다는 위안. 길고 긴 세월의 짐이 그녀의 어깨에서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하준은 편지의 내용을 읽고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할머니… 지우 고모할머니가… 행복하게 사셨군요. 그나마 다행이에요…”

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마당의 매화나무로 향했다. 봄바람이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바람은 더 이상 그리움과 서글픔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멀고 먼 땅에서 온 소식, 잃어버렸던 가족의 흔적을 담은 따뜻한 속삭임이었다. 지우가 평생 그리워했던 봄바람, 노란 꽃의 향기를 기억했던 그 바람은, 이제 반백 년을 돌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와 잃어버린 딸의 마지막 인사를 전해주고 있었다.

윤희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봄꽃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더 이상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인한 고통은 없었다. 대신, 한없이 투명한 슬픔과 함께, 비로소 얻게 된 평온이 자리했다. 멀리서 찾아올 손녀 향기를 기다리며, 윤희는 처음으로 지우의 삶을 온전히 애도하고, 동시에 그녀의 남은 삶을 새로운 희망으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