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겨울은 늘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을 실어 날랐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침부터 잿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지더니, 정오를 넘기자마자 솜털 같은 눈송이들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서윤은 건축 설계 사무실의 창가에 앉아 노트북 화면 대신 창밖을 응시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세상은 금세 흰색 베일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그녀의 손끝은 무심코 오래된 스케치북의 표지를 쓸었다. 낡고 헤진 종이 위에는 흐릿한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10년 전, 그 약속의 날에 하준이 그려주었던 ‘치유의 정원’ 스케치.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온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잔디밭, 그리고 모든 슬픔을 잊게 해줄 것 같은 고요한 연못… 그때는 모든 것이 꿈처럼 선명했다.
“서윤 씨, 괜찮아요?”
동료 정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들려 있었다. 서윤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그냥… 눈이 와서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번 ‘숲의 위로’ 프로젝트, 정말 서윤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진행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특히 그… 핵심 조형물 디자인은 정말 압권이에요.”
‘숲의 위로’는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추모 공원이자 치유의 공간이었다. 서윤은 이 프로젝트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단순히 일을 넘어, 그녀의 삶의 모든 것이 응축된 작업이었다. 특히 정우가 언급한 ‘핵심 조형물’은 그녀의 개인적인 아픔과 염원이 담긴 부분이었다. 거대한 눈물방울 형상의 유리 조형물, 그 안에 피어나는 생명력 있는 식물들. 그녀는 그것을 ‘희망의 눈물’이라 명명했다.
“근데… 강 작가님이 오늘 최종 검토하신다고 했던가요? 좀 일찍 오시네요.” 정우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서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강 작가. 강하준. 그녀의 약혼자였고, 약속의 상대였으며, 10년 전 눈꽃 속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남자.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사진작가이자, 이 프로젝트의 최종 기록을 담당하는 공식 아티스트.
사무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겨울 공기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섰다. 짙은 코트 차림의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10년 전의 따뜻하고 장난기 넘치던 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낯설게 차가웠고, 세상의 모든 풍경을 무심하게 담아내는 카메라 렌즈 같았다.
“오셨군요, 강 작가님.” 정우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설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보지 않고 지나쳐주길 바랐지만, 하준의 시선은 정확히 그녀에게 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차가운 눈빛 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최종 디자인 스케치를 보러 왔습니다.” 하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 없는 인형 같았다.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서윤은 ‘희망의 눈물’ 조형물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설명할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하준과 함께 꿈꿨던 정원, 서로의 손을 맞잡고 미래를 약속했던 그 순간들. 그때의 그는 식물학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던 사람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회의실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정우는 하준의 반응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서윤은 하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디자인을 어떻게 평가할지, 아니, 어떻게 자신을 평가할지 궁금했다.
“전체적으로 훌륭합니다.”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조형물은… 전체적인 흐름에 비해 너무 감정적입니다.”
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감정적이라뇨? 이 공간은 치유를 위한 곳입니다. 희망을 잊지 않기 위한 상징이 필요해요.”
“추모의 공간은 때로는 과도한 감정 표현보다 담담한 위로가 더 필요합니다. 눈물방울 조형물은 지나치게 슬픔을 부각합니다. 마치 잊지 말라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전문가의 평가였다. 하지만 서윤에게는 비수가 되어 박혔다.
“당신이 뭘 안다고…!”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준은 변명 한마디 없이 그녀를 떠났다. 그가 그녀의 상처를 알 리 없었다. 자신이 떠난 후 그녀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이 정원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우가 당황하며 서윤을 말렸다. “서윤 씨, 진정해요. 강 작가님도… 나름의 의견이 있으신 거겠죠.”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서윤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이건… 우리가 함께 만들기로 했던 그 정원과 연결되어 있어요. 당신이 떠나고 남은… 내 약속이에요!”
하준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서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밖에서는 눈이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창밖의 세상은 온통 흰색으로 변해갔다.
그날 저녁, 서윤은 사무실을 나섰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거리는 이미 눈으로 뒤덮여 아름답게 반짝였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정우였다. “서윤 씨, 괜찮아요? 집에 잘 들어갔어요?”
“아직이요. 그냥… 좀 걷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추모 공원 부지 근처에 다다랐다. 아직 공사 중이라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너머로 희미하게 ‘희망의 눈물’ 조형물이 세워질 자리가 보였다.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마치 10년 전 그날처럼. 서윤은 눈발 속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카메라 플래시였다. 설마, 하준?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고 펜스 너머를 살폈다.
하준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눈 쌓인 부지 한가운데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뭔가를 찍고 있었다. 그가 찍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설계한 ‘희망의 눈물’ 조형물이 세워질 자리였다. 그는 렌즈를 통해 그곳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회의실에서의 냉철함과는 달랐다. 무언가 깊은 고뇌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서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하준은 카메라를 내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수첩을 펼쳐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서윤은 그 수첩이 낯설지 않았다. 10년 전, 그가 늘 가지고 다니던 스케치 수첩. 그 안에 그녀가 그려주었던 정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에는, 그들의 약속이 적혀 있었다.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 반드시 함께 이곳에 치유의 정원을 만들자. 그리고 이 눈꽃 속에서 맹세한 우리의 꿈을 영원히 간직하자.”
하준은 그 수첩을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서윤은 보았다. 차가운 눈발 속에서, 그의 어깨 위에 쌓이는 눈은 마치 그의 감춰진 눈물 같았다. 그는 차마 회의실에서 내뱉지 못했던 진실을, 지금 이곳에서 침묵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하준….”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눈꽃 속에 흩어졌다. 하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카메라를 들고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섰다. 그의 시선은 잠시, 아주 짧게 서윤이 숨어있는 펜스 쪽을 향하는 듯했지만, 곧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윤은 하준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볼에는 차가운 눈물과 함께 눈송이가 엉겨 붙었다. 하준의 눈빛. 그의 떨리는 어깨. 그리고 그가 품고 있던 낡은 수첩.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말 변한 걸까? 아니면, 그도 자신처럼, 잊지 못하고 아파하고 있는 걸까?
그날 밤, 서윤은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웠다. 눈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온 세상은 새하얀 눈밭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하준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변했든,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그 약속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아침 햇살이 눈꽃 위로 부서지며 영롱하게 빛났다. 서윤은 노트북을 켰다. ‘희망의 눈물’ 조형물 디자인 파일이 열렸다.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조형물의 각도를 조금 수정했다. 그리고 주변에 심겨질 식물들의 배치를 다시 조정했다. 감정적인 요소를 조금 덜어내고, 대신 더욱 깊은 위로와 침묵의 희망을 담으려 했다. 하준이 말했던 ‘담담한 위로’.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10년 전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