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445화

늦가을의 초입, 창밖 풍경은 이미 겨울의 초상을 품고 있었다. 낮게 깔린 회색 구름이 얇아진 햇살마저 집어삼킨 오후. 나는 낡은 찻잔을 든 채 창가에 앉아, 마당 한구석에 서 있는 감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익어가는 몇 개의 감만이 고독하게 매달려, 지난 계절의 마지막 숨결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듯했다.

마음속 풍경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깊어가는 계절만큼이나 내 안에도 알 수 없는 쓸쓸함이 파고들었고, 어쩐지 오늘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림자 하나가 오래된 먼지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내 발치에서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조용히 다가와 살며시 다리에 몸을 비비는 녀석, ‘그 애’였다. 부드럽고 윤기 나는 검은 털, 가끔은 너무나 깊어서 우주를 담고 있는 듯한 두 눈. 녀석은 고개만 살짝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말 없는 시선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익숙한 질문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오늘따라 좀 그래, 그 애야.” 나는 녀석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맘때가 되면 이상하게… 자꾸 옛날 생각이 나.”

그 애는 가늘게 눈을 뜨고 내 손길을 만끽하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내가 하는 말의 진짜 의미를 꿰뚫어 보려는 듯, 평소보다 더욱 진지한 눈빛이었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말았다.

“오래전,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있었어. 너무 어렸고, 서툴렀지. 고마운 것도, 미안한 것도 많았는데…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어. 그리고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버렸고… 결국은 말하지 못한 채로 헤어지게 됐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회한이 오랜만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치 어두운 심해에서 부유하는 난파선처럼, 그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애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가만히 내 옆에 앉아, 꼬리를 바닥에 나직이 탁탁 부딪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이따금씩 고개를 쳐들고 나의 눈을 바라보거나, 혹은 창밖의 감나무를 응시했다. 녀석의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풀듯, 내 마음의 매듭을 더듬는 듯한 섬세함이 있었다.

깊어지는 침묵 속의 대화

“그때는 왜 그렇게 용기가 없었을까?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나는 과거의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라면, 아니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많은 것을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했을 텐데…”

나의 탄식은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애는 달랐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게감이 내 허벅지에 안정적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가슴팍으로 다가와, 뺨을 대고는 나직이 ‘골골’ 소리를 냈다. 단순한 애교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마치 고요한 밤의 자장가처럼, 나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이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애를 품에 안았다. 녀석의 심장 박동이 내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고 여리지만, 분명하게 존재하고 뛰는 생명의 리듬. 그 애는 나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편안한 숨을 쉬고 있었다. 이토록 완벽한 신뢰와 평온함이라니.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었다. 녀석의 따뜻한 온기가 나에게 스며들면서, 내 안에 뭉쳐 있던 차가운 응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애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비난도, 판단도 없었다. 오직 이해와 공감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깊은 눈 속에서, 나는 희미하지만 선명한 메시지를 읽어냈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어. 하지만 너는 여기, 지금 존재하고 있어. 과거의 아픔이 너를 묶어두게 하지 마. 네가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만들어낸 환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과의 긴 대화 속에서 나는 종종 이런 ‘목소리’를 듣곤 했다. 그 애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 순간의 아름다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현재를 사랑하는 법을.

다시 찾아온 평온

나는 그 애의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햇살과 흙, 그리고 녀석 특유의 따뜻한 냄새가 나를 감쌌다. 마음속의 회한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위에 한 꺼풀 부드러운 위로의 막이 덧씌워진 듯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붙들고 현재를 잃어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을. 녀석은 나에게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위대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다.

창밖의 감나무는 여전히 고독했지만, 그 위에 매달린 붉은 감들은 더 이상 슬픔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긴 겨울을 견뎌낼 굳건한 생명력처럼, 혹은 지난 계절의 풍요를 기억하라는 조용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 애는 내 무릎 위에서 만족스러운 듯 다시 몸을 웅크렸다. 나도 조용히 눈을 감고 녀석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대화는, 말 한마디 없이도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그런 순간들. 그 애는 오늘도 나에게 그런 순간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제는 미지근해진 차였지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 온기를 음미했다. 창밖은 더욱 어둑해졌고, 곧 밤이 찾아올 터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더 이상 어둠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지 않았다. 대신, 그 애의 따뜻한 온기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오늘도 그렇게, 나에게 살아갈 힘과 위로를 주었다.

녀석이 내 무릎 위에서 가늘게 하품을 했다. 나는 녀석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 작은 존재가 주는 위로가, 세상의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저물어가는 하루를 함께 보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