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41화

차가운 비가 창문을 사납게 두드리는 밤이었다. 거실 스탠드 불빛 아래, 낡은 가죽 표지의 일기장을 펼쳐 든 미나의 손은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시렸다. 바깥세상의 소음은 아득히 멀어지고, 오직 할머니의 붓글씨만이 고요한 밤의 주인공이 되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삶의 굽이에서, 미나는 늘 이 일기장 속으로 도피하곤 했다. 할머니의 지혜와 강인함이 새겨진 글자들은 길 잃은 배에게 등대가 되어주었다.

오늘은 유독 한숨이 깊었다. 미나가 추진하던 프로젝트는 끝없는 난관에 부딪혔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마저 하나둘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득, 할머니는 이런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하는 물음이 가슴을 짓눌렀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쌉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오늘 선택된 페이지에는 “1973년 겨울, 대설(大雪)의 해”라는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할머니의 글은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미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어찌 이리 눈이 쉼 없이 내리는가. 벌써 사흘째다. 마당에 쌓인 눈은 어린아이 키를 훌쩍 넘어섰고, 지붕 위에는 하얀 솜이불이 두껍게 덮였다. 아궁이에서는 연신 불을 지피지만, 차가운 한기는 쉬이 가시지 않는다.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막막함이다. 식량은 바닥을 보이고, 아이들은 칭얼거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창밖은 온통 하얀 절망뿐인데, 그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어미의 숙명인가 보다.

미나는 숨을 죽였다. 할머니의 고통이 글자 하나하나에 서려 있었다. 사진 속 늘 온화하게 웃던 할머니에게도 이처럼 절박하고 암울한 시간이 있었음을, 미나는 이 일기장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남편은 마을 어귀로 나갔다. 눈길을 헤치고 이웃 마을이라도 가보겠다며, 혹여 곡식 한 줌이라도 구해 올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 나섰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저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을 바랐던가. 아니다. 나는 굳게 다짐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리라. 솥 바닥에 눌어붙은 보리쌀을 긁어내 죽을 끓이고, 얼어붙은 냇가에서 얼음 깨고 물을 길어 냈다. 아이들의 작은 손을 잡고, 괜찮다, 괜찮다, 속삭였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어야만 했다.

할머니의 글은 이어졌다. 그날 밤, 남편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모두가 고립된 상황에서 누구도 누구를 도울 수 없었던 혹독한 겨울이었다. 하지만 일기장의 다음 문장은 미나의 가슴을 쿵 하고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은 잠이 들 때마다 엄마, 아빠를 부르며 웃었다. 작은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고, 차가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 온기만으로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굶주림 속에서도, 절망 속에서도, 작은 웃음꽃은 피어나는 법이다. 언젠가 이 눈이 녹으면, 따스한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 하나로, 나는 오늘 밤도 낡은 담요를 덮고 잠이 들 아이들을 위해 작은 불씨를 지킨다. 이 밤이 지나면, 분명 해는 다시 뜰 테니까.

미나는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차가운 종이 위로 할머니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는 듯했다. 눈물 한 방울이 미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그 혹독한 겨울을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견뎌냈다. 굶주림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냈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미나의 프로젝트도 어쩌면 지금, 할머니의 그 겨울과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끝없는 난관들. 하지만 할머니의 글은 미나에게 속삭였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어야 한다. 작은 불씨를 지키는 마음으로, 내일의 해를 기다려야 한다.’

미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트러진 머리를 묶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아직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은 전보다 한층 또렷해져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나는 더 이상 홀로 헤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속에는, 그녀의 삶과 용기가 고스란히 남아 미나에게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분명 새로운 해가 뜰 것이다. 그리고 미나는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 새로운 해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빗소리는 여전히 거셌지만, 미나의 마음속에는 이제 작은 불꽃 하나가 흔들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