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이는 봄바람은 오래된 기와지붕 아래 멈춰 선 시간마저 흔드는 듯했다. 매년 이맘때면 담벼락에 기대선 매화나무 가지마다 분홍빛 인사를 건네고, 낡은 마루 틈새로 삐져나온 햇살은 먼지 가득한 기억들을 어루만졌다. 서연은 댓돌에 앉아 햇볕을 쬐는 옥분 할머니의 굽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희끗한 머리카락은 봄바람에 실려 온 꽃잎처럼 가볍게 흩날렸다.
“할머니, 차 드릴까요?”
서연의 목소리에 옥분 할머니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어딘가 아득한 표정이 스쳤다. “그래,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따뜻한 걸로 한 잔 다오.”
부엌으로 들어선 서연은 찻주전자를 올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을 어귀의 벚나무는 이미 만개하여 온통 하얀 구름 같았고, 그 아래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려왔다. 문득, 서연의 시선이 마당 한켠의 작은 텃밭에 닿았다. 겨울 내내 굳어있던 흙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그 사이로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매년 이맘때면 손수 가꾸는 텃밭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아직 씨앗을 뿌리지 않으신 듯했다.
따뜻한 유자차를 내오자 옥분 할머니는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차 향기가 옅게 퍼지며 얼어붙었던 마루에도 온기가 도는 듯했다.
“올해는 텃밭 농사를 안 지으실 건가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봄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손주 녀석이 돌아오면 같이 심으려고.”
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가 ‘손주 녀석’이라고 부르는 이는 서연의 어린 삼촌, 지후였다. 지후는 스무 해 전,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라던 그 아이는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이후로 할머니는 매년 봄이면 텃밭을 일구며 지후가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마치 지후가 돌아오면 함께 심을 씨앗을 위해 땅을 비워두는 것처럼.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 한다지만, 할머니에게는 그 세월이 멈춰버린 듯했다. 서연 역시 지후 삼촌의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낡은 사진 속, 해맑게 웃고 있는 지후 삼촌의 얼굴은 서연의 기억 속에서도 흐릿했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언제나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그때였다. 마당의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마을 회관에서 매번 크고 작은 소식을 전해주는 재섭 아저씨가 서 있었다. 아저씨의 손에는 낯선 이가 들고 다닐 법한 낡은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옥분 할머니, 서연아! 좋은 소식인가 싶기도 하고, 아닌가 싶기도 하고… 희한한 일이 다 있네!”
재섭 아저씨는 흥분한 목소리로 마루에 올라섰다. “어제저녁에 말이야, 타지에서 온 젊은이가 길을 헤매고 있기에 우리 마을 회관에서 하룻밤 묵으라고 했거든? 그런데 그 젊은이가 이걸 가지고 다니더란 말이야.”
재섭 아저씨가 내민 것은 닳고 닳은 작은 나무 오리 인형이었다. 한쪽 날개가 부러지고 눈 한쪽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 모양새만은 분명했다. 서연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기억 속, 할머니의 궤짝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지후 삼촌의 유일한 장난감과 똑같았다.
옥분 할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는 그 인형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거칠어진 손가락이 매끄러웠던 나무 표면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인형의 배 부분을 살짝 눌렀다. 희미한 소리가 ‘삑’ 하고 났다. 마치 작은 오리가 울음을 터뜨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지후가 떠난 후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소리였다.
“이건… 지후가 가지고 놀던 건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재섭 아저씨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 젊은이가 그러는데, 어릴 적에 길가에서 주운 거라고 하더만. 부모가 누군지 기억도 잘 안 나고, 그저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최근에 고향을 찾아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그러면서 이 오리 인형을 잃어버렸던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서연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스무 해를 넘게 기다려온 소식. 봄바람이 실어온,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할머니의 눈에 고인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오리 인형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마치 어린 지후를 다시 품에 안은 것처럼.
“그 아이는 어디에 있니?” 할머니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재섭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서 쉬고 있을 겁니다. 얼굴에… 작은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할머니와 서연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후 삼촌의 어린 시절 사진 속에는 왼쪽 눈썹 위에 작은 칼자국 같은 흉터가 선명했다. 장난치다가 다쳤던 상처였다.
그 순간, 마당을 스쳐 지나가던 봄바람이 한층 거세게 불어왔다. 벚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리며 마루 위로 떨어졌다. 마치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열리고, 그 사이로 새로운 희망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옥분 할머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릿했던 눈빛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나무 오리 인형이 꼭 쥐여 있었다.
“가자, 서연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스무 해의 기다림과 억눌렸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서연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더 이상 느리지 않았다. 봄바람은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며, 사라졌던 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듯 속삭였다. 느티나무 아래, 새로운 만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무 해 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