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466화

차가웠던 바람의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깎여 나가고, 부드러운 솜털 같은 기운이 온 세상을 감싸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봄이었다. 해원의 작은 정원에는 겨우내 움츠렸던 새싹들이 희미한 연둣빛을 띠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흙냄새 짙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이름 모를 풀들 사이에서 돋아나는 어린 생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여린 잎을 살짝 쓸어보니, 간밤의 이슬이 아직 촉촉하게 맺혀 차가웠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속삭였지만, 해원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는 겨울의 한기가 스며 있었다.

십 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한 생애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해원은 동생 지훈의 소식을 기다려왔다. 갑작스레 집을 떠나 아무런 기별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지훈. 그때의 지훈은 스무 살, 막 세상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파릇한 청년이었다. 그 후로 그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지훈을 찾아 헤매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이제 해원에게 남은 것은 이 낡은 집과, 동생을 향한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기다림뿐이었다.

“해원아, 또 정원에 앉아 있니?”

담벼락 너머에서 정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옆집에 사는 연주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넉넉한 인상에 언제나 해원을 친딸처럼 보살펴주는 분이었다. 해원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아주머니, 오셨어요? 햇살이 좋아서 잠시 나와 앉았어요.”

연주 아주머니는 담을 넘어 해원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갓 쪄낸 따끈한 쑥떡이 들려 있었다. “아침부터 찬바닥에 앉아 있으면 몸이 상한다. 이리 와서 쑥떡이라도 좀 먹어라. 며칠 전부터 속이 허해 보였다.”

해원은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에 늘 감사했다.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집에서 홀로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떡을 받아 들고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지자,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녹아내리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덕분에 늘 힘을 내요.”

두 사람은 낡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쑥떡을 베어 물었다. 쌉쌀하면서도 달큰한 쑥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때,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어제 말이다, 아랫마을 장터에 나갔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원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아주머니의 ‘이상한 이야기’는 언제나 작은 마을의 소문이거나 시시콜콜한 잡담이었지만, 가끔은 알 수 없는 예감이 그녀의 등골을 스치곤 했다. 아주머니는 해원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 동네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약초를 파는 노인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주 먼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젊은이를 보았다고 하더구나.”

해원은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은 채 아주머니를 응시했다. ‘젊은이’. 그 단어 하나에 그녀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아주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젊은이가… 키가 꽤 크고,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눈빛을 가졌다더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오른손에 아주 깊은 흉터가 있다고 했어. 어릴 적 불꽃놀이하다 다친 것 같은 상처라고.”

순간, 해원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오른손 흉터. 그것은 지훈에게만 있는 표식이었다. 어릴 적 호기심에 불장난을 하다가 뜨거운 불꽃에 데어 생긴 깊은 상처. 지훈은 늘 그 흉터를 감추려 애썼지만, 해원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열 살 때, 상처 때문에 서럽게 울던 어린 지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이….” 해원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그 이름이 새어 나오자, 십 년간 꾹꾹 눌러 담았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지훈이일까요?”

연주 아주머니는 해원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도 확실치는 않다. 그 노인이 본 것이 그저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 흉터 이야기,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나 지훈이와 닮았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게 전해주는 거다.”

해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머니의 말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겨울잠에서 깨어난 봄바람이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부터 가져온,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하나의 ‘소식’이었다. 그녀는 이 소식이 헛된 희망일까 봐 두려웠지만, 동시에 꺼져가던 심장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이 거짓말처럼 다시 솟아났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해원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흐느낌이 격해질수록, 그녀의 눈앞에는 지훈의 어릴 적 얼굴, 함께 뛰놀던 정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훈의 쓸쓸한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주머니, 그 노인…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바닷가 마을이 어디라고 했나요?” 해원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 대신,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싹튼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연주 아주머니는 해원의 굳건한 눈빛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글쎄다. 그 노인은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라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남쪽 바닷가라고만 들었다. 어쩌면 이 봄바람이 너에게 직접 알려준 것일지도 모르지.”

해원은 툇마루에서 내려와 마당의 흙을 밟았다. 새싹들이 그녀의 발아래서 힘차게 돋아나고 있었다.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이 비록 한 조각의 그림자 같은 희망일지라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봄바람이 실어다 준 이 소식은, 그녀에게 잊고 있던 삶의 방향을 다시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 따스한 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마치 지훈의 목소리처럼, 그녀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누나, 나 여기 있어.’

해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그녀는 떠나야 했다. 십 년의 기다림을 끝내고, 이 희미한 소식을 따라 미지의 길을 나설 때였다. 남쪽 바닷가, 지훈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 발걸음은 봄의 생명력처럼,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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