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가르며 닭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장님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낡았지만 정든 마당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이맘때쯤이면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주황빛 감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늦가을 햇살 아래 마을 곳곳에서 피어나는 들꽃들이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는 시기였다. 후루룩, 후루룩. 직접 내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마을 어귀를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아직 단풍이 채 가시지 않은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으음, 가을도 다 저무는구먼.”
이장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력을 확인했다. 이번 주말은 마을에서 작은 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거창한 축제는 아니었지만, 다들 바쁜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한 해 동안 고생한 서로를 격려하며 정을 나누는 자리였다.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들을 나누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어놀며, 어르신들은 쭈그리고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박하지만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장님은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문을 열자마자 어제 미리 들여놓은 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무, 싱싱한 배추, 그리고 고소한 참기름 내음. 이장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잔치 준비에 착수했다.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고, 스피커를 점검했다. 잠시 후, 몇몇 부녀회원들과 젊은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추를 다듬고, 김치를 버무리는 손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장님, 박 할머니는 아직 소식이 없어요? 늘 잔치 때 제일 먼저 오셔서 맛있는 부침개 해주셨잖아요.”
부녀회장님의 말에 이장님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박 할머니. 올해로 아흔을 바라보는 박 할머니는 이 마을의 산증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손맛이 좋아 마을 잔치 때마다 제일 인기 있는 음식은 할머니가 직접 부쳐낸 바삭한 해물파전이었다. 그런데 요 근래 할머니의 모습이 영 보이지 않았다. 가을걷이 할 때도, 장 보러 나설 때도, 읍내 버스를 기다릴 때도 할머니의 그림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한번 들러봐야겠어.”
이장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일을 잠시 멈추고 박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흙담으로 둘러싸인 할머니 댁은 언제나 정겹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적막하게 느껴졌다. 이장님은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서 마루 앞에 섰다. 인기척을 알리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나지막이 할머니를 불렀다.
“박 할머니! 계세요? 이장 왔습니다!”
한참을 기다리자, 끼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박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고, 눈빛에는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이장님은 마음이 저릿했다.
“아이고, 이장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무슨 일이요, 할머니는. 잔치 준비 때문에 온 거지요. 다들 할머니 손맛 기다린다고 아우성입니다. 할머니 부침개 없으면 잔치가 아니라고요.”
이장님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을 뿐,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다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허리도 시큰거리고. 손도 뻣뻣해서 밀가루 반죽하기도 힘들어. 이젠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뭘.”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자조 섞인 감정이 묻어 있었다. 늘 활기차던 할머니의 이런 모습에 이장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마을의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기력을 잃어가고, 예전처럼 잔치에 함께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모습은 이장님이 가장 마음 아파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에게 다가섰다.
“에이, 할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가 해물파전 안 부쳐주시면 누가 그 맛을 내겠어요. 제가 다 할 테니 할머니는 옆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주세요. 반죽 제가 해오고, 재료 다 제가 썰어 올게요! 할머니는 그저 간만 봐주시면 됩니다. 딱, 할머니가 ‘음, 됐다!’ 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장님은 너스레를 떨며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예전보다 훨씬 차갑고 거칠었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쓸쓸함이 이장님의 진심 어린 말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래도… 내가 이제 남들한테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무슨 폐예요! 할머니는 이 마을의 보물인데! 할머니가 계셔야 이 마을에 정이 있고 흥이 나는 거예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할머니 안 오시면 서운해하실 거예요. 다들 할머니 그리워하고 있어요. 제발 좀 와주세요, 네? 부탁드립니다!”
이장님은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할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한참을 망설이던 할머니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장님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못 이기는 척해야지 뭐.”
“크하하! 역시 우리 할머니! 제가 바로 가서 재료 다 가져올게요! 할머니는 옷만 예쁘게 차려입고 기다리세요!”
이장님은 기쁨에 겨워 박수를 쳤다. 할머니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는 한겨울 굳게 얼어붙었던 땅에 봄 햇살이 내리쬐는 것처럼 따뜻하고 반가웠다. 이장님은 서둘러 마을 회관으로 돌아와 할머니 댁에 가져갈 재료들을 챙겼다. 싱싱한 해물과 파, 부침가루를 한 아름 들고 다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 댁 마루에 앉아, 이장님은 서툰 솜씨로 해물과 파를 썰고 밀가루를 개었다. 할머니는 그 옆에 앉아 이장님의 어설픈 손길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듣는 할머니의 웃음소리에 이장님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장님이 힘들게 만든 반죽에 할머니는 손가락을 살짝 넣어 맛을 보더니, “아니야, 아니야. 소금을 더 넣어야지.” 하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이장님에게 직접 소금 간을 맞추는 법을 알려주었다. 할머니의 손길은 여전히 섬세하고 정확했다.
“후라이팬은 이걸로 쓰는 게 좋아. 기름은 넉넉하게 두르고.”
할머니는 어느새 이장님 뒤에 서서 하나하나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장님은 할머니의 지휘 아래 부침개를 부치고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부침개 냄새가 할머니 댁 마당 가득 퍼졌다. 몇 장 부쳐낸 부침개를 접시에 담아 할머니께 내밀자, 할머니는 뜨거운 부침개를 한 입 베어 물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음, 이 맛이야. 아직 죽지 않았네, 내 손맛.”
그제야 할머니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음식이 주는 기쁨을 되찾은 듯했다. 이장님은 뿌듯함에 어깨를 으쓱였다.
잔치가 시작될 무렵, 이장님은 박 할머니와 함께 마을 회관으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이장님이 직접 만든 부침개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박 할머니의 등장에 환호하며 반겼다. 부녀회장님은 얼른 달려와 할머니의 쟁반을 받아 들고는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부침개 너무 기다렸어요!” 하며 할머니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박 할머니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 가득한 시선과 웃음소리에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어르신들도 박 할머니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장님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비록 혼자서는 힘들어하는 박 할머니였지만, 함께라면 여전히 마을의 소중한 존재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이 잔치에서 가장 맛있을 음식은, 할머니의 손맛이 담긴 부침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할머니가 다시 찾은 활기였을 것이다.
이장님은 모두가 어우러져 웃음꽃을 피우는 잔치 마당을 둘러보았다. 이 소박한 행복을 지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이라고, 그는 새삼 깨달았다. 해 질 녘 노을이 마을을 붉게 물들이는 가운데,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또 하나의 따뜻한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유쾌한 이장님의 하루는, 그저 즐거운 일들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작고 소중한 마음들을 보듬어주는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